5일 오전 6시에 필자의 집인 목압서사에서 출발했다. 오늘은 고향(대구시 달성군 논공읍 노이1동)의 함안 조씨 동계공파 문중 선산에 벌초를 하는 날이다. 오전 8시30분부터 벌초를 시작한다고 총무인 조호곤(62)으로부터 2주 전쯤에 문자가 왔었다. 네비게이션을 켜니 집에서 2시간 20분 걸린다고 떴다.
화개에서 구례를 거쳐 남원IC로 빠졌다가 광주-대구 고속도로를 타고 지리산휴게소와 거창휴게소를 지나 동고령IC로 내렸다. 고령 성산을 거쳐 논공읍으로 갔다. 논공읍 ‘돌끼’에서 우회전하여 갈실마을회관 앞인 ‘새창마당’에 도착하니 오전 8시 25분이었다. 조호곤(62)과 조경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회관 뒤쪽에 있는 호곤 집에 가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새창마당으로 갔다. 조근식(69) 형님이 예초기를 지고 오시고, 고령에 있는 문중 회장님인 조일현(70) 조카님이 1톤 트럭에 예초기를 몰고 오셨다. 월배 쪽에 사시는 조병욱(68) 조카님도 오셨다. 해마다 벌초에 늘 참석하는 멤버들이었다.
산소로 올라가 벌초를 시작했다. 예초기를 사용하는 사람은 일현·근식·호곤 세 사람이었다. 필자는 집에서 낫을 가지고 가 낫으로 풀을 베었다. 허리가 아픈 필자는 한 번 구부렸다 일어나니 허리가 욱신거렸다. 그렇다고 낫질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 “나중에 또 병원에 가야겠구나” 생각을 하면서도 계속 허리를 구부려 일을 했다.
좀 있으니 상완(60) 조카가 올라왔다. 경호와 상완 조카는 잘라놓은 풀을 쇠스랑으로 걷어냈다. 근식 형님과 일현 회장님의 예초기 솜씨는 프로급이었다. 병욱 조카는 산소에 있는 묘석을 수건으로 닦아냈다. 사람이 많다보니 금방 벌초를 마쳤다. 오전 9시 반 밖에 되지 않았다. 근식 형님이 “아직 점심 먹기에 이르니 산소 아래쪽의 나무를 좀 자르자”라고 해 호곤과 상완 조카가 톱을 가지러 갔다. 근식 형님이 “앞으로 우리 아래 아이들이 산소 돌보겠나? 큰일이다.”라고 말했다. 일현 회장님은 “나중에 우리 죽고 산소 돌 볼 사람 없으면 돈을 주고서라고 벌초를 해야지. 어쩌겠나?”라고 응수를 했다.
호곤과 상완이 톱을 3개 가지고 왔는데 시원찮았다. 겨우 쓸 수 있는 건 한 개였다. 호곤이 나무를 자르다 근식 형님이 톱을 받아 더 잘랐다. 근식 형님이 “이제 그만해야 겠다. 더 이상 할 수도 없겠다.”라고 말하며, 작업을 마쳤다. 문중 산소 전체 상석 앞에서 “벌초를 마쳤습니다.”라며 조상님들께 고를 하고 절을 한 후 산에서 내려왔다. 오전 11시가 좀 넘은 시간이었다.
내려오니 마을회관 뒤쪽 창고에서 근식 형님댁 형수가 빨간 고추를 손질하고 계셨다. 형수는 “대럼 왔는기요? 요새 비가 많이 와 고추 꼬라지가 이렇다 아이가.”라고 말했다. 형수는 친정이 이 마을이다.
호곤 집에 와 작업복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점심은 논공농협 옆에 있는 할매국밥집에서 먹기로 했다. 해마다 벌초 후 이 국밥집에서 점심을 먹고 헤어졌다. 국밥집에 들어가 코로나19 때문에 한꺼번에 앉지 못하고 4명, 3명으로 나눠 앉았다. “제가 별로 한 일도 없으니 점심값을 내겠습니다.”라고 병욱 조카님이 말했다.
지난해에 병욱 조카님이 점심 값을 내었으므로 올해는 필자가 내려고 말하자 총무인 호곤이 “올해는 마 회비로 하자.”라고 말해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었는데, 병욱 조카님이 또 내시겠다고 했다. 필자는 “지난해에도 내셨는데, 올해 또 내면 어떡하십니까? 오늘은 제가 내겠습니다.”라고 하니까, “아제, 마 괜찮습니다.”라고 억지로 만류해 그렇게 하기로 했다. 필자는 “그러면 내년에 제가 내겠습니다.”라고 말해 오늘 점심값 실랑이는 해결됐다. 병욱 조카님 부부는 두 분 모두 교사 출신이어서 연금을 각각 수령하기 때문에 조금 여유가 있다고 했다. 질부님은 차인(茶人)으로 대구의 영남차인회 사무국장을 맡고 계신다.
밥을 먹으면서 호곤은 “병욱 조카님 아버님인 형님이 올해 아흔으로 현재 우리 갈실 문중에서 가장 연세가 높으시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병욱 조카님은 “아버지와 어머니는 따로 아파트에 사시는데 아직 정정하시다”라고 말했다.
밥을 다 먹고 나오면서 필자는 준비해간 ‘섬진강 재첩국’을 하나씩 드렸다. 하나에 재첩국 팩이 두 개씩 들어있는 것이다. 전날 오후에 화개장터서 구입하여 아이스박스에 보관해 가져왔다. 그런데 이번 벌초에는 평소보다 사람이 많이 참석해 재첩국 봉지가 1개 모자랐다. 호곤에게 양해를 구하고 별도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해마다 필자가 만든 녹차를 한 통씩 드렸는데, 지난봄에는 녹차 만드는 창고가 불에 타 차를 제대로 만들지 못했던 것이다.
헤어지고 달성군청 인근에 있는 TAGA COFFEE카페로 갔다. 대학 문학회 후배인 목헌(木軒) 박재범(54) 대구 청구고 국어교사와 만나기로 했다. 목헌은 진학부장을 맡고 있는데, 곧 수시원서를 쓰는 기간이어서 엄청 바쁘다. 그런데도 필자를 위해 시간을 내주었다. 카페서 만나 커피를 마시고 도동서원(道東書院)으로 향했다. 이곳서 20분가량 소요되는 거리였다.
도동서원은 알다시피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제자로 ‘소학동자’라 불린 한훤당 김굉필을 배향하는 공간이다. 우리나라 5대 서원 중 하나이다. 서원에 도착하니 입구에 있는 수월루(水月樓) 보수공사를 하는 탓에 천막 등으로 가려져 있었다. 비가 간간이 내리는데 관광객이 제법 많았다.
목헌이 “얼마 전 이번에 수시원서를 넣을 딸 선영이와 이곳에 왔었다”라고 말했다. 필자는 “내 할아버지께서도 이곳에 출입하셨다고 알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목헌도 역사와 고전문학 등에 관심이 많은 탓에 서원 뜰에 서서 한참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필자는 대학 때 버스를 타고 몇 번 서원에 왔을 당시의 풍광을 이야기 해 주었다.
서원에서 나오니 앞에 있는 500년 된 은행나무 아래서 한 여성 대금연주자의 촬영이 있는지 PD의 지시에 따라 대금을 불다가 또 다른 포즈를 취했다가를 반복했다. 공중에는 드론이 떠 왔다 갔다 했다. 한원당 선생의 외손자인 한강 정구 선생이 심었다는 이 은행나무는 늦가을에 보아야 멋이 있다. 이 일대가 정비되기 전에는 서원 앞이 백사장이었다.
서원 옆쪽에 있는 한 카페에 갔다. 규모가 엄청났다. 서원 앞쪽의 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얼마 전 필자의 집에서 문학회 친구들이 와 1박을 하면서 놀고 갔다. 그날 밤에 송담(松潭) 박주동(59) 선생이 왼쪽 발의 아킬레스건이 터져 봉합수술을 받고 2주간 출근을 못하다 지금은 목발을 짚고 수업을 한다는 이야기도 나누었다.
여러 이야기를 하다 카페서 나와 이른 저녁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현풍시장에 있는 현풍닭칼국수 식당에 가 필자는 닭곰탕을 먹고 목헌은 매운닭칼국수를 먹었다. 필자의 차를 TAGA COFFEE카페에 세워놓아 다시 그 카페로 가 목헌과 헤어졌다. 그리곤 바로 대구-광주고속도로를 타고 지리산휴게소에서 한 번 쉬고 집으로 돌아왔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 massjo@injurytime. 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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