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오전 10시쯤 하동 화개 목압서사에서 경남 고성으로 출발했다. 고성 연화산IC에서 빠져 대가면에 있는 ‘사단법인 동시·동화나무의 숲’(이하 동동숲)으로 방향을 잡았다. 가는 길은 굽이진 농촌 들판이 이어졌다. 그러다 좁은 길로 접어들면서부터는 더 꾸불꾸불했다. 지리산에 사는 필자가 무안할 정도로 골짜기였다. 산 전체를 태양광으로 만들어놓은 곳도 있고, 사슴 목장도 있었다. 목장을 지나니 비포장길이었다.
원래 진주서 고성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전화를 하면 여동(如湩) 배익천(裵翊天·72) 선생님이 차로 마중 나오시기로 했다. ‘이 길로 필자를 태우러 나오려면 얼마나 힘드실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차를 몰고 온 게 다행이다 싶었다.
국제신문 근무 시 차를 몰고 전국 방방곡곡으로 취재하러 다닐 때도 이렇게 험한 길은 없었다’라는 생각도 들었다. 말로만 듣던 여동 선생님의 동동숲에 드디어 도착했다. 필자가 신문사 문화부 기자시절부터 여동 선생님을 알고 지냈다. 선생님은 당시 부산MBC에서 『어린이문예』를 발간하고 계셨다.
예원(藝園) 박미숙(朴美淑·64) 선생님이 반겨주셨다. 예원 선생님의 안내로 식당으로 가니 점심 식사를 준비해놓고 필자가 오기를 기다리고 계셨다. 여동 선생님과 감로(苷魯) 홍종관(洪鍾寬·73) 선생님, 의사인 여동 선생님의 아들(41), 대가면장과 고성군 과장을 지내시고 ‘동동숲 작은 도서관’의 관장으로 자원봉사를 하고 계시는 송정욱(65) 관장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주방 일을 도와주시는 아주머니도 계셨다.
감로 선생님은 서예가이자 소리꾼으로 부산 민락동에서 방파제 횟집을 운영하시며 번 돈을 모두 각종 문화사업에 투자하신다. 2004년 늦가을, 여동 선생님이 동동숲을 구입할 때도 돈을 마련해주셨다. 감로 선생님의 부인이신 예원 선생님도 서예가다.
상추와 풋고추 등으로 차린 점심을 맛있게 먹은 후 여동·예원 선생님의 안내로 동동숲을 구경하였다. 계곡에서는 아이들이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오늘 오후 2시에 열리는 ‘작가와의 대화’에 참석할 아이들이었다.
동동숲의 역사는 1990년 5월에 여동 선생님이 숲 아래인 대가면 연지리 방화골에 들어오면서 시작됐다. 작은 집에 향파 이주홍(1906~1987) 선생님의 글씨인 ‘작은 글마을’을 내걸었다. 이후 동동숲을 구입하면서 감로·여동·예원 세 분이 산을 개간하기 시작했다. 삽과 곡괭이로 길을 만들고 터를 다졌다. 고성군청에서 약간의 도움을 주었다. 최근에 1만 평을 더 구입했다. 동동숲은 현재 우리나라 아동문학의 메카로 자리집고 있다.
포클레인으로 좁은 길만 내고 포장을 하지 않아 최근에 내린 비로 길 곳곳이 패이고 풀이 자라있었다. 두 분은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흘러내린 돌을 치우고 낫으로 풀을 베면서 걸었다.
잠시 후 샘물에 도착했다. 여동 선생님 등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이 인근에 샘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땅을 파고 헤집은 끝에 묻혀 있던 샘을 찾았던 것이다. 물에 민감한 필자가 마셔보니 아주 시원할뿐더러 맛이 순하고 달면서 미네랄이 풍부한 느낌이었다.
예원 선생님이 끈이 연결된 고무 ‘다라이’에 작은 돌들을 주워 오시자 샘 바로 아래쪽에 땅을 판 여동 선생님이 묻었다. 하수관 옆으로 물이 새자, 그 물을 다른 쪽으로 돌리기 위함이었다. 여동 선생님이 필자에게 “우리가 일하는 동안 ‘작가와의 대화’를 하고 있는 강당에 들어가 함께 앉아 있으세요”라고 말씀하셨다. 강당이 어떤지 보자는 생각에서 가 창문을 통해 내부를 들여다보니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개별적으로 앉아 작가분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필자가 동석할 자리가 아닌 것 같아 돌아와 ‘다라이’ 하나를 얻어 돌을 주워 담아왔다. 예원 선생님과 필자는 몇 차례 반복하는 동안 여동 선생님은 돌들로 하수관 옆 낮은 부분을 메웠다.
며칠 있다 동화작가 소중애 선생님이 샘 앞에서 아이들에게 강의도 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질 계획이어서 터를 평평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테이블도 놓아야 한다고 했다. 조금 있으니 감로 선생님과 송 관장님이 오시어 아래쪽에 있는 침목을 작업하고 곳으로 옮기기로 했다. 침목이 무거워 필자도 거들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허리를 쓸 수가 없었다. ‘다라이’에 돌을 주워 끌고 올 때 허리가 끊어질 듯 통증이 왔는데 아픈 체를 할 수가 없어 계속 일을 도왔다. 그런데 무거운 침목을 함께 드니 사달이 난 것이었다. 서 있을 수도 없어 앉아 있었다. 세 분이 더 일을 하셨다.
일을 마치고 아래 마을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송 관장님은 딸이 와 함께 저녁을 먹기로 해 가시고, 역사동화작가인 박형섭(54) 이사님이 동행했다. 박 이사님은 동동숲 ‘열린 아동문학관’ 상주 작가로 기획을 돕고 있다. 삼척시와 하동군 등 몇 개 지자체의 기획을 도왔거나 도우고 있다고 했다.
식당에서 오리백숙을 먹고 동동숲으로 올라와 계곡 옆 누각으로 갔다. 여동 선생님이 식당에서 일부러 양조장까지 가시어 사온 고성 막걸리를 함께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15년 전에 누각을 지었다고 했다. 하지만 누각에 현판이 없었다. 바로 옆 계곡의 물소리가 커 필자가 “현판 이름으로 ‘청수루(聽水樓)’가 어떠시냐?”고 여쭈어보니, “좋다”고 하셨다. 필자는 현판 글자와 ‘청수루’ 주제의 판상시를 한 수 써드리기로 약속을 했다.
밤이 깊어가자 계곡에서 한기가 몰려왔다. 감로 선생님이 창가를 하려고 북까지 위에서 갖고 오셨으나, 한기가 들어 먼저 방으로 올라가셨다. 예원 선생님으로부터 지금의 동동숲이 만들어지기까지 그동안 세 분이 고생하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해결하고 가꾸어야 할 일이 많다고 하셨다. 세 분이 오랜 세월동안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얼마나 고생을 많이 하셨는지, 그리고 고생하고 계신지 가늠을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자리가 파하자 제대로 허리를 펴지 못하고 어기적거리며 건물 2층 방으로 올라갔다. 여동 선생님이 전기장판을 깔아 자리를 봐주셨다. 예원 선생님이 “내일 아침 6시 반에 거실에서 차를 마시며 하루의 일을 의논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방에 누워 잠을 청했다.
다음날인 19일 아침 6시 반이 되니 예원 선생님이 “차 마실 분 나오세요”라고 말씀 하시어,필자는 “저도 참석해도 됩니까?”라며 여쭈었다. 괜찮다고 하시어 필자도 참석했다. 감로·여동·예원·박 이사님과 필자 5명이 아침 차를 마셨다. 차를 마신 후 1층 식당으로 가 아침을 먹었다.
문학관 건물 아래에는1만 평의 산을 구입할 때 포함된 작은 집이 있다. 원래 몸이 아픈 사람이 들어와 3년간 살다 회복됐다는 공간이다. 집에서 마주 보이는 봉우리가 천왕봉인데, 그 봉우리의 기운을 받아서 완쾌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여동 선생님 등 세 분이 이 집에서 기거하다시피 하면서 문학관 건물을 지었다.
아침을 먹고 있는데 필자가 거주하고 있는 지리산 화개의 목통마을에 계시는 신애리 선생님에게서 문자가 왔다. 올해 초 초등학교 교사로 퇴직하신 신 선생님은 시인이다. “문인 한 분이 집에 오시어 점심을 먹기로 했는데, 함께 합시다”라는 것이었다.
아침 식사 후 출발하려고 하자 예원 선생님은 이것저것 먹거리를 챙겨주시고, 여동 선생님은 개인 작품집과 동동숲에서 발행하는 계간 잡지 『열린 아동문학』을 한 권을 주셨다.
여동 선생님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아동문학가로, 수십 권의 개인 작품집을 발간하셨다. 필자가 받은 『열린 아동문학』은 2021년 여름호로 89호였다. 이 잡지는 원래 동시인이자 시인인 유경환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발행하셨다. 그러다 2007년 6월 타계하셨다. 잡지는 그해 가을호(36호)까지 나왔다. 이후 겨우 39호까지 발행되다 중단됐다.
이 잡지를 여동과 감로 선생님이 인수하시어 2009년 봄호(40호)부터 속간하였다. 한편으로 동동숲이 원래 ‘동화나무의 숲’이었지만 동시(童詩)도 수용해 ‘동시·동화나무의 숲’으로 명명한 것이다. 이 잡지의 제작비와 작가들의 원고료는 감로 선생님이 부담하신다.
지역신문인 ‘고성신문’이 정부의 지원 사업으로 매주 동동숲에서 ‘작가와의 대화’를 하고 있다. 오는 10월 16일에는 동동숲에서 ‘제2회 고성 공룡 책 축제’와 ‘제11회 열린 아동문학 시상식’을 갖는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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