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지리산 산책 (72) - 차산에 원두막 ‘청학루(靑鶴樓)’를 짓다

나흘 반나절 만에 원두막도 누각도 아닌 어중간하게 지어
최명철 목공예명장 권유로 혼자 쉴 공간 계획서 규모 커져
국제신문 동료인 이완용 국장이 현판 '청학루' 새겨주기로

조해훈1 승인 2021.05.08 11:50 | 최종 수정 2021.05.10 14:07 의견 0

57일 오전 도재명차 뒤로 돌아 차산으로 올라가려고 개울 다리를 건너는데 바로 옆 고추밭에서 일을 하시던 윤도현 어르신이 조 선생, 신선이 되려는 갑네. 여기는 신선이 살던 곳이지 않는가라고 말씀하셨다. 위쪽 차산에 필자가 며칠 전부터 원두막도 아니고 누각도 아닌 어중간한 것을 짓느라고 왔다 갔다 하는 걸 보신 것이다.

오늘 오전에 원두막 짓는 걸 마무리 한다. 계단을 만들고 네 기둥에 보강 작업을 한 후 마쳤다. 나흘 반나절 만이다. 최명철(崔明喆·47) 명장과 보조를 했던 신종석(申鐘碩·46) 선생에게 고생 많았다는 인사를 했다. 셋이서 서로 돌아가면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리곤 조만간에 원두막에 앉아 삼겹살 파티를 열기로 했다.

원두막 기둥을 세우는 모습.
원두막 기둥을 세우는 모습. 사진=조해훈

원두막을 짓기로 생각한 것은 몇 달 전이었다. 차산에서 일을 하다가 좀 쉬고 싶어도 마땅한 곳이 없어 자그마한 원두막이 하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그러다 가탄리 백혜마을에 있는 루나카페서 그런 이야기를 나누다 김명철 목공예 명장과 연결이 되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필자 혼자 앉을 수 있는 작은 원두막을 만들기로 했다. 그러다 최 명장이 이왕 만드는 것 제대로 만듭시다라고 제안해 원두막이 거의 누각 수준이 되었다.

나흘 반나절의 공사 기간 중 첫날 하루는 최 명장이 자신의 작업장에서 원두막 공사에 쓰일 나무작업을 했다. 작업 이틀 뒤부터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아침에 최 명장과 신 선생이 집에 오면 차를 한 잔 하면서 이야기를 하다 차산으로 올라갔다. 자재를 산으로 옮기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5일 본격적인 첫 작업을 하다 산에서 내려와 최 명장의 큰 누님이 운영하시는 남도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화개장터에서 남도대교 건너 하천보건소 바로 앞이다. 행정구역은 전남 구례군 간전면 하천리이다.

원두막에 사람이 앉을 수 있는 마루 작업을 하는 모습.
원두막에 사람이 앉을 수 있는 마루 작업을 하는 모습. 사진=조해훈

밥을 먹으면서 최명장에게 ()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운담(雲潭)”이라고 했다. 필자는 오랫동안 고민하다 호를 하나 지었는데 어떻게 할까요?”라고 말했다. 그는 무엇입니까라고 대답했다. 필자는 목도(木道)”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무로 삶을 살고 있으니까, 나무를 통해 세상의 이치()를 깨우친다는 의미라고 할까요라고 말했다.

그를 안 것은 제법 되었다. 루나카페서 만나면 서로 커피값을 내기도 했다. 최 명장은 201877일자로 ()한국전통문화예술진흥협회와 대한민국전통명장협회로부터 대한민국전통명장패를 받았다. 전통납죽목공예명장(傳藝18-118)으로 지정을 받은 것이다. 그는 27살이던 2004년에 팔자가 근무한 국제신문 제2전시실에서 제1회 개인전을 가진 후 지금까지 4차례의 개인전을 가졌고 말했다.

보조를 하는 신 선생은 부산과 구미 등 여러 곳에서 생활하다 한 달 전에 악양으로 귀촌해 최 명장과 함께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원두막에서 바라보는 풍경. 황장산 아래 용강마을 일부와 화개동천 부분이 조망된다. 사진=조해훈
원두막에서 바라보는 풍경. 황장산 아래 용강마을 일부와 화개동천 부분이 조망된다. 사진=조해훈

최 명장이 작업 전에 도재명차 뒤에 내려놓은 기둥 등 나무 자재 몇 개를 필자가 차산에 올라갈 때마다 어깨에 메고 가져다 놓았다. 어깨에 살이 없다보니 뼈가 아팠다. 차산 작업 첫날에도 기둥을 짊어지고 갔었는데 많이 아팠다. 최 명장은 지게에 물건을 졌고, 신 선생과 필자는 어깨에 메고 올라갔다.

원두막 작업장 옆 차밭에 제때 따주지 않은 고사리가 쑥쑥 자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고사리를 보이는 대로 손으로 뽑았다. 키가 커 거의 나무 수준이었다. 놔두면 겨울에 더 자라 차나무를 뒤덮어 버린다.

원두막 작업공정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기둥 네 개를 세웠다. 땅이 평평하지 않아 앞쪽 두 개는 돌을 받쳐 그 위에 세웠다. 뒤쪽 두 개는 곡괭이로 땅을 파 세웠다. 그런 다음 골격을 만들었다. 원두막 높이가 높았다. 지붕은 양철로 얹었다. 사람이 앉는 곳인 마루에는 장판을 깔았다.

원두막을 다 만들고 마루에 앉으니 전망이 괜찮았다. 맞은 편 황장산 아래 용강마을 일부와 화개동천 부분이 조망되었다.

원두막을 완성한 후 최명철(왼쪽) 명장과 필자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원두막을 완성한 후 최명철(왼쪽) 명장과 필자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원두막이지만 현판을 하나 걸기로 했다. 현판에 쓸 나무는 최 명장이 하나 주었다. 흔히 기목으로 부르는 느티나무였다. 전각을 하는 국제신문 동료 기자인 이완용 국장과 상의를 하니 기꺼이 해주시겠다고 했다. ‘바람 소리 듣는 누각이란 의미에서 청풍루(聽風樓)’라고 말했다. 하지만 고민을 해보니 이곳이 불일폭포(원래 청학폭포)와 고운 최치원이 청학을 타고 놀았다는 전설 등 청학과 관련한 이야기가 많은 곳이어서 청학루(靑鶴樓)’라고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못 쓰는 글씨이지만 필자가 글을 쓰면 이 국장님이 음각으로 각을 해 주시기로 했다.

아래채의 현판은 집에 나 뒹구는 나무판을 주워서 붓글씨로 써 대충 붙였는데, 차산의 원두막은 각을 한 현판을 걸기로 한 것이다.

필자가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차회인 차사모의 백경동 회장님께 “5월 차회를 원두막서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라고 여쭈어보니, “그렇게 하도록 추진해 보겠다라고 말씀하셨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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