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지리산 산책(65)- 쌍계사 방장 고산 스님의 다비식
5일장으로 27일 영결식 및 국사암 아래 연화대서 다비식
울산 출생, 13세 출가, 법랍 74년, 세수 88세로 23일 열반
조문객 500명 넘고 벚꽃 만개하고 비내리는 가운데 진행
조해훈1
승인
2021.03.27 23:00 | 최종 수정 2021.03.29 13:27
의견
0
오늘 3월 27일 오전 11시 30분쯤부터 필자의 집 앞 작은 광장을 통해 국사암 쪽으로 스님을 비롯한 신도들의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오전 10시에 인근 쌍계사 경내 도원암 앞에서 고산 방장 스님의 영결식이 있었다. 영결식은 종단장으로 치러졌다. 거기에 참가한 스님과 신도들이 식을 마친 후 다비장이 열리는 국사암 쪽으로 스님을 추모하면서 발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서도 긴 행렬이 이어졌다. 필자도 그 행렬에 끼어 함께 걸었다. 다비식이 열리는 장소는 국사암 좀 못 미쳐 쌍계연지(雙磎蓮池) 위쪽 평평한 땅인 연화대였다. 그곳으로 가는 길목에 고산 스님의 어록과 법문 등에서 발췌한 내용을 적은 만장 수십 개가 길 양쪽으로 펄럭거렸다.
다비식장을 둘러싼 수많은 조문객들이 고산 스님의 일대기를 담은 동영상을 보며 기다렸다. 오후 1시 가까이 돼서야 영구차가 도착했다. 다비식을 치를 준비를 마친 후 행사 관계자들이 불을 붙이고 불길이 타올랐다. 조문객들은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며 그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마이크 앞에 선 스님도 목탁을 두들기며 “나무아미타불”을 쉬지 않고 염송했다. 필자도 조문객들 속에 섞였다. 이날 조문객들은 500명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됐다.
스님이 창건한 부산의 혜원정사에서 왔다는 한 신도는 "벚꽃이 만개해 꽃비가 내리는 가운데 스님의 다비식이 열려 바로 원적에 드실 것 같다"고 아쉬운 심경을 밝혔다.
사진작가들도 보기 드문 다비장을 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관계자들의 저지를 받으면서도 가까이서 부지런히 촬영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1시간 넘게 다비장이 진행되는 모습을 보다 조문객들에게 하나씩 나눠주는 도시락을 받았다. ‘도시락을 필자가 어찌 받나’라는 생각을 하다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받았다. 이미 조문객들이 거의 내려간 상황이었다. 비가 더 많이 내리고 도시락을 먹을 곳도 마땅찮아 집으로 내려왔다.
집에 오니 오후 2시 반쯤 되었다. 도시락을 얼른 먹고 쌍계사로 걸어갔다. 쌍계초등학교 앞쪽에 ‘큰스님 우리 곁에 다시 오소서’라는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팔영루에 빈소가 있어 들어가 삼배를 했다.
필자는 쌍계사 옆에 살다보니 멀리서 고산 스님을 몇 번 뵐 기회가 있었다. 스님은 지난 23일 오전 8시 46분 쌍계사에서 법랍 74년, 세수 88세로 원적에 들었다.
1933년 12월 9일 울산시 울주군에서 출생한 고산 스님은 13세 되던 해 13세가 되던 해 출가해 3년 만에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고, 8년 후 비구계를 수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스님은 조계사·은해사·쌍계사 등에서 주지를 지냈으며, 조계종 총무원장과 전계대화상 등을 역임했다. 부산 혜원정사, 경기도 부천 석왕사를 창건해 도심 포교에 앞장섰고, 경남 통영 연화도에도 연화사를 창건했다.
스님은 다음과 같은 임종게를 남겼다고 한다. ‘봄이 오니 만물은 살아 약동하는데 가을이 오면 거두어 들여 다음 시기를 기다리네. 나의 일생은 허깨비 일과 같아서 오늘 아침에 거두어들여 옛 고향으로 돌아가도다.’
이날 필자가 조문 행렬에 섞이기 전 집에 있을 때 고등학교 동창 한 명이 다른 고교 동창 한 명과 부부동반으로 불일폭포 산행을 하기 위해 오고 있다는 전화를 받았다. 필자는 “국사암 쪽은 고산 큰스님 다비식 관계로 올라가기 힘들 테니 쌍계사를 통해 갔다가 집에 와 차 한 잔 마시고 가라”고 답했다. 연화대에서 다비식이 막 시작될 무렵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차가 너무 막혀 화개로 갈 수가 없어 부산으로 차를 돌렸다”며, “다음에 다시 오게 되면 그때 만나자”라고 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