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나루엔 안개 자욱한데(孤烟橫古渡·고연횡고도)/ 차가운 해 먼 산으로 지네. (寒日下遙山·한일하요산)/ 노 젓는 배 느릿느릿 오고(一棹歸來晩·일탁귀래만) /절집은 아득한 구름 안개 사이에 있네. 招提杳靄間·초제묘애간)
정렴(鄭磏·1505~1549)의 시 「배를 타고 저자도를 지나 봉은사를 향해 가며(舟過楮子島向奉恩寺」로, 그의 문집인 『북창집(北窓集)』에 수록돼 있다. 그가 배를 타고 저자도를 지나 봉은사를 향해 가고 있다. 사공이 삐거덕 삐거덕 젓는 배를 타고 안개 속을 헤치며 가는 모습은 한 폭의 수묵화 이미지이다.
위 시를 지은 정렴은 누구일까?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그에게 다가가보자.
본관이 온양(溫陽), 자는 사결(士潔)이고, 호가 북창(北窓)인 그는 1505(연산군 11)에 좌의정 순붕(順鵬·1484~1548)의 아들로 태어나, 33세인 1537년(중종 32)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장악원(掌樂院·조선시대 궁중에서 연주하는 음악과 무용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관청) 주부를 거쳐 관상감·혜민서의 교수를 역임하였다.
정렴은 어려서부터 영민하였던 모양이다. 『북창집』에 수록된 허목(許穆)의 『기언(記言)』에 수록된 「청사열전」에 따르면 정렴이 부친을 따라 14세에 중국에 간 기록이 있다. 그의 시 「요양객관작(遼陽客館作)」은 이 당시에 정렴이 지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렴은 유불선 삼교에 정통했지만, 사고와 행동을 관통하는 것은 공자의 사상을 기준으로 한 인륜(人倫) 중시 사상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유원이 지은 『임하필기(林下筆記)』 제24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에도 정렴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있다. 그 내용에 따르면 ‘정렴은 신묘하게도 여러 나라의 언어를 이해하였다. 일찍이 중국에 갔을 때 유구국(琉球國) 사람이 그를 찾아와 『주역』을 가르쳐 달라고 청하자, 그는 즉시 유구국의 말로 가르쳐 주었다. 관(館)에 있던 여러 나라 사람들이 그 소문을 듣고서 찾아오자 각기 그 나라의 언어로써 대화를 나누니, 그를 천인(天人)이라고 칭찬하면서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라고 했다. 그런 내용을 참작할 때 그는 언어에도 탁월한 능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천문·지리·의서·복서(卜筮) 등에 두루 능통하였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약의 이치에 밝았는데, 1544년 중종의 병환에 약을 짓기 위하여 내의원제조들의 추천을 받아 입진(入診)하기도 하였다. 그가 경험한 처방을 모아 편찬한 것이라는 『정북창방(鄭北窓方)』이 있었으나 유실되고 현전하지 않는다. 이 책은 양예수가 지은 『의림촬요(醫林撮要)』에 인용되어 있다.
이후 정렴은 마지막 벼슬이었던 포천현감으로 부임하였다. 하지만 1545년(명종 즉위년) 부친이 윤원형·이기 등과 함께 을사사화를 일으켜 많은 선비를 죽이고 귀양 보내자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났다. 을사사화로 죽은 사람이 100여 명이 넘었다. 이들 세 사람은 을사삼간(乙巳三奸)으로 일컬어진다.
정렴의 사람됨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북창집』에 있는 그의 「유훈(遺訓)」을 보자.
“세상에 처함에는 겸손하고 물러남을 힘써서 높은 벼슬을 바라지 말고 몸을 낮춰 살 것이며, 권세 있는 집안에 붙어 혼인하지 말라. 시절이 태평하면 벼슬을 해도 되나 세상이 어지러우면 전원으로 물러나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하라.” 그의 처세관을 짐작할 수 있는 글이다.
홍만종은 『해동이적(海東異蹟)』에서 “유·불·선 삼교(三敎)뿐만 아니라 천문·지리·의약·복서·율려·산수(算數) 및 산수화에 능통했는데 스승도 없었고 제자도 없었다”라고 정렴을 설명하고 있다.
한무외가 우리나라 도가의 맥을 기술한 책인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에는 정렴이 ‘배우지도 않고서도 외국어를 구사했으며, 새 소리와 짐승 소리는 물론 백리 밖의 일을 알았으며, 신선이 됐다’고 기술하고 있다. 물론 어느 정도 과장된 부분이 있겠지만 여하튼 정렴은 보통 사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성리학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 및 불교·도교에도 정통했고 그림과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매월당 김시습, 토정 이지함과 더불어 조선의 3대 기인으로 꼽힌다.
정렴은 이인(異人)의 기질을 타고났다고 한다. 그가 남긴 도가와 관련한 일화들이 많다. 부친이 강원감사가 되어 금강산을 유람할 때 동행하여 비로봉에서 소(嘯)를 불었는데, 산꼭대기에서부터 골짜기를 울리는 웅장한 소의 소리가 났다. 사람들은 그 소리가 사람이 부는 것이 아닌 신선의 소리로 착각하였다고 한다.
부친의 정치적인 삶에 염증을 느낀 그는 도사처럼, 방외인으로 바람처럼 살고자 했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리하여 산속으로 들어가 몸을 숨기며 고독하게 살았으며, 만년에는 방술(方術)에 심취해 지냈다고 한다.
그는 시 한 수를 지어놓고 앉은 채로 삶을 마감했다고 한다. 정렴은 부친이 주도한 사화를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비애감 등으로 관직을 버리고 산중으로 들어가 하루에 천 잔의 술을 마시며 스스로 목숨을 줄여나가 좌화(坐化)한 것이다.
그의 문집인 『북창집』은 그의 방외인적 삶과 사상을 반영하는 작품이 제법 있다. 그의 시편들은 도교적 기풍이 다분해 일반적인 유가의 문인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시풍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북창비결(北窓祕訣)』 이란 도교 내단수련법의 입문서도 남겼다. 필사본으로 현재 규장각도서에 소장돼 있다. 같은 내용이 김시습의 『매월당집』에도 들어 있다. 구한말의 무능거사 이능화의 『조선도교사』에도 『북창비결』의 수련사 전문이 수록되어 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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