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론계 시파계열 인물인 김재칠의 장남으로 태어난 담정(藫庭) 김려(金鑢·1766~1822)는 32세 때인 1797년(정조 21) 11월 12일 강이천(姜彝天)의 비어옥사(蜚語獄事)에 연루되어 함경도 경원에 유배되었다가 유배지에 도착하기 전 왕명으로 다시 함경도 북동부지역인 부령으로 옮겨졌다. 그해 12월 10일 부령에 도착할 때까지 29일간의 유배길을 일기로 남겼다. 그날들의 일기가 『감담일기(坎萏日記)』이다.
강이천은 1797년에 천주교인이라 하여 사학 죄인(砂學罪人)으로 몰려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때 모진 고문으로 숨졌다. 주문모 신부와 함께 효수되었다.
김려는 이처럼 글 쓰는 게 습관이 된 사람이었다. 그는 유배지 부령에서 4년을 보냈다. 그곳에서 연희라는 여성을 만났다. 1801년(순조 1)에 강이천사건이 재조사되어, 김려는 천주교도와 교분을 맺은 혐의로 부령에서 진해로 유배되었다.
그는 진해에서 연희에 대한 그리움과 부령에서의 기억 등을 담아 장편 연작시인 『사유악부(思牖樂府)』를 지었다. ‘사유’란 바로 진해 적소의 편액으로, 부령에서 있었던 일을 회고하면서 지은 것이다. 김려의 저서인 『담정유고(潭庭遺稿)』 권5, 6에 실려 있다. 상권에 147수, 하권에 143수가 수록되어 모두 290수로 구성된 방대한 분량이다.
그러면 이제 『담정유고(潭庭遺稿)』 권8에 수록된 「우해이어보서(牛海異魚譜)」의 내용을 보겠다. 이를 보면 그가 진해에서는 어떻게 지냈는지를 알 수 있다. 내용을 요약해 설명하겠다.
진해를 다른 이름으로 ‘우해(牛海)’라고 불렀다. 그가 세를 얻어 유배를 사는 집은 섬 귀퉁이에 붙어 있고 문이 큰 바다에 닿아 있었다. 셋방을 그는 ‘우소헌(雨篠軒)’으로 칭했다. 그곳에 산지 두 해가 지났다. 집주인은 작은 배 하나를 갖고 있었다. 열한두 살 먹은 주인집 아들은 글을 제법 읽을 줄 알았다. 김려는 그 아이와 함께 배를 저어 바다로 나갔다. 멀리 갈 때는 하루나 이틀 정도 자고 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그가 모르는 물고기들이 너무 많았다.
그리하여 물고기들의 형태와 색채, 성질, 맛 등을 기록해 나갔다. 그러나 상어·방어·오징어처럼 누구나 아는 물고기와 물개·돌고래 등 어류라고 보기 어려운 생물들, 방언이나 비속어로 된 생물들은 제외했다. 그렇게 해서 한 권이 되자 다시 잘 베껴 써 『우해이어보』라 한 것이다. 그가 이 서문을 쓴 게 잔해에 유배된 지 3년째인 1803년(계해년) 9월 29일이었다.
즉 『우해이어보』는 담정 김려 선생이 우해(牛海)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직접 관찰하거나 어민들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저술을 시작해 1803년 늦가을 탈고한 우리나라 최초의 어보이자 수산학서이다. 신유박해에 이어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신지도에서 흑산도로 옮겨 유배생활을 한 정약전이 1814년께 저술한 『자산어보』보다 11년 앞서며, 서유구의 『난호어목지』(1820년께)보다 약 17년 앞선다.
그러면 김려의 『우해이어보』에는 어떤 글들이 들어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만 실례를 들어보자. 원문은 생락한다.
“원앙은 원앙어라고 하고, 바다 원앙이라고도 한다. 생김새는 연어 비슷한데 입이 작고, 비늘은 비단 같으며, 아가미는 붉고, 꼬리는 길다. 몸통은 짧아 마치 제비 같다. 이 물고기는 암컷과 수컷이 반드시 따라다니는데, 수컷이 가면 암컷이 수컷의 꼬리를 물고서는 죽어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낚시꾼들은 반드시 쌍으로 잡는다. 이곳 토박이들은 ‘이 물고기를 잡으면 눈알을 빼내어 잘 말렸다가 사내는 암컷의 눈알을 차고 계집은 수컷의 눈알을 차면, 부부가 서로 사랑하게 할 수 있지요.”라고 말한다. 이 물고기가 늘 있지는 않다.
내가 세 들어 사는 집 이웃에 이생이란 자가 살았는데, 한 번은 거제도 앞바다로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잡아가지고 돌아와서는 내게 보여준 적이 있다. 물고기는 이미 절반이나 말랐는데도 오히려 꼬리를 문 채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나는 「우산잡곡(牛山雜曲)」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포구의 젊은 아낙 엷게 화장을 하고/ 흰 모시 적삼에 옥색치마를 차려 입었네./ 남 몰래 비녀를 들고서 고기잡이배로 가서는/ 제일 먼저 비녀 팔아 해원앙을 사는구나.’“
재미있으며, 가슴 뭉클한 내용이지 않은가? 과연 해원앙이 바다 속에 사는 원앙이 맞는 모양이다. 젊은 아낙이 비녀를 팔아 어부에게 해원앙을 사니 말이다. 『우산잡곡』은 『우해이어보』에 들어있으며, 한시 39수가 실려 있다.
김려는 1806년에 아들의 상소로 10년 만에 유배가 풀려 서울로 돌아왔다. 1812년에 의금부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라 정릉참봉·경기전영(慶基殿令)을 거쳤다. 1817년에 연산현감이 되었다. 1819년에 연산을 떠난 뒤부터 몸이 약해졌다. 함양군수로 재직 중에 생을 마쳤다.
저서로 『담정유고』 12권이 있으며, 말년에는 『한고관외사(寒皐觀外史)』·『창가루외사(倉可樓外史)』 등 야사를 편집했다. 『우해이어보』는 정약전의 『자산어보』와 함께 우리나라 어보의 쌍벽을 이루는 것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이처럼 김려는 자신이 어디에 있든 항상 글을 쓴 글쟁이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글쓰기 습관이 『우해이어보』를 만들어 낸 것이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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