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산(蛟山) 허균(許筠·1569~1618)이 35살이던 1603년 8월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에게 빌려간 책을 돌려달라고 편지를 썼다. 그가 춘추관의 편수관(編修官)에서 해직돼 있을 때였다.
“옛사람의 말에 ‘빌려간 책은 언제나 되돌려주기는 더디고 더디다’ 했지만, ‘더디다’는 말은 1, 2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강(史綱)』을 빌려드린 지 10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되돌려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벼슬할 마음을 끊고 강릉으로 아주 돌아가 그 책이나 읽으면서 소일하고자 합니다. 감히 사룁니다.”(古人言 ‘借書常送遲遲’之遲者‘ 指一二年也. 『史綱』之借上 星紀將易 幸擲還爲望. 鄙生亦絶志仕宦 大歸江陵 欲資此以敵閑也. 敢白.)
편지의 제목은 ‘여정한강 계묘팔월(與鄭寒岡 癸卯八月)’로,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권20에 수록돼 있다. ‘성소(惺所)’는 허균의 또 다른 호이다. ‘부부고(覆瓿藁)’는 자신의 저서를 후세 사람들이 장 항아리 덮개로 쓸 것이라고 겸양조로 하는 말이다. 『성소부부고』는 허균의 문집이다.
허균은 26세 때인 1594년(선조 27)에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98년 황해도도사(都事)가 되었으나 서울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했다는 탄핵을 받고 부임한지 6달 만에 파직됐다.
그 뒤에 여러 벼슬을 지냈으며, 1603년 여름에 춘추관 편수관을 겸임하다가 해직되었다. 춘추관은 시정의 기록을 맡은 관아였다.
그는 세상이 만만하지 않음을 절감하고는 고향인 강릉으로 돌아가 역사서인 『사강』을 읽으면서 은거하겠다는 뜻을 편지에 비치고 있다.
잘 알다시피 허균은 독서광이자 책 수집광이었다.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 오면서 언제나 책을 가득 구입해 왔다. 이러한 내용을 알 수 있는 그의 글이 있다.
허균은 고향인 강릉 경포 호숫가에 ‘호서장서각(湖墅藏書閣)’을 만들고 쓴 「호서장서각기(湖墅藏書閣記)」에서 “내가 마침 명나라 사신으로 갈 일이 있어 육경(六經), 사서(四書)를 비롯해 『성리대전』 『좌전』 『국어』 『사기』 『문선』과 이백·두보·한유·구양수의 문집, 그리고 사륙변려문, 『통감』 등의 책을 연경에서 구해 왔다. 이 책들을 바리바리 실어 강릉 향교로 보냈는데, 향교의 선비들은 논의를 거치지 않았다 하여 사양하였다. 나는 경포 호숫가에 있는 별장으로 가서 누각 하나를 비워 그곳에 책을 수장하였다. 고을의 선비들이 빌려 읽고자 하면 읽게 하였으며, 다 읽으면 반납하도록 하였다.”(『성소부부고』 권6)라고 적었다.
허균은 1614년과 1615년 두 차례에 걸쳐 명나라를 다녀왔다. 처음 사행은 성절사로, 다음에는 진주사의 직책을 띠었다. 두 번의 사행에서 그는 수많은 책을 사서 귀국하였다. 들여온 책이 만 권을 넘었다고 하니 엄청난 양이었다.
그는 정구에게 편지를 쓴 이듬해인 1604년 9월에 황해도 북부에 있는 수안(遂安) 군수에 제수되었다. 하지만 불교를 믿는다는 등의 이유로 2년 만에 탄핵을 받아 물러났다. 그의 인생역정은 파란만장하였다. 하지만 그는 어떤 상황에서든 늘 책을 가까이 했다.
허균의 시비평집 『학산초담』과 『성수시화』, 시선집 『국조시산』, 자찬문집 『성소부부고』, 소설 『홍길동전』 등에는 그의 독서 편력이 녹아들어 있다. 소품집 『한정록』에는 인용된 중국 도서가 무려 100종 가까이 된다. 이러한 사례를 볼 때에도 그의 독서력은 대단했다.
그의 독서 편력과 문장력은 집안에 내려오는 유전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허균의 아버지는 서경덕의 문인으로서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동지중추부사 허엽(許曄)이다. 어머니는 강릉 김씨로 예조판서 김광철(金光轍)의 딸이다. 임진왜란 직전 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허성(許筬)이 허균의 이복형이고, 문장으로 이름 높았던 허봉(許篈)과 허난설헌(許蘭雪軒)과 형제이다.
그런 집안 출신이다 보니 어려서부터 늘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허균은 또 당대의 큰 학자였던 유성룡에게 학문을 배웠다. 시는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한 사람인 이달에게 배웠다.
한편 허균은 자신의 장서를 혼자 독점하지 않고 공유하려 했다. 오늘날 공공도서관의 개념을 생각한 것이다. 그 실천이 바로 호서장서각이었다.
허균이 한강에게 책을 돌려달라고 편지를 쓴 때는 30대였지만, 이후의 그의 삶을 볼 때 왜 책을 반납하라고 했는지 이해가 된다. 당시는 물론 책이 엄청나게 귀하기도 했지만, 허균 자신은 당대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독서광이자 책 수집광이었기 때문이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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