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칠팔 세 때에 글을 제법 엮을 줄 알았다. 선친께서 어느 날 조생(趙生)으로부터 『당송팔가문(唐宋八家文)』 한 질을 사주며 ”이 사람은 책주름 조생이란다. 집에 소장된 책들은 모두 이 사람에게서 사들였다“라고 하셨다. 그의 모습은 사십 남짓 되어 보였다. 손꼽아보니 벌써 사십 년 전 일이다. 그런데 지금도 늙지 않았으니 조생은 정말 보통 사람과 다르다. 그때 나는 조생 보기를 좋아했고, 조생도 나를 좋아하여 자주 들렀다. 나는 이제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손자를 안은 지도 벌써 여러 해가 되었다. 조생은 장대한 체구에 불그레한 뺨, 검은 눈동자에 검은 수염이 여전하다. 지난날의 조생과 견주어보니, 아! 기이하도다!”(조수삼(趙秀三), 『추재집(秋齋集)』 4책, 보진재, 1939, 참조. 안대회,『벽광나치오』, 휴머니스트, 2012, 재인용. )
조선 후기의 시인 조수삼(1762~1849)의 위 글에 나오는 ‘조생’은 18세기 중엽 이후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서울의 지식집단에 명성이 자자하던 책장수인 조신선을 일컫는다. 다산 정약용을 비롯하여 조희룡(趙熙龍)과 조수삼이 그에 대한 글을 많이 썼다. 조선후기 사릉참봉·의령현감 등을 역임한 문신인 서유영(徐有英)이 쓴 『금계필담(錦溪筆談)』에도 조신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며, 그 외 여러 글에도 실려 있다. 그들은 대개 조신선으로부터 책을 구입한 사람들이다.
책을 사고파는 거간꾼을 책쾌(冊儈)·서쾌(書儈)·책주름이라 일컬었다. 조선시대에 지식과 정보를 전하는 가장 중요한 매체가 책이었는데, 정작 정부는 서점 설립을 금하거나 억제했다. 지식과 정보를 정부가 관장하고 통제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서적은 떠돌이 장수인 서쾌가 담당했던 것이다.
어득강(魚得江·1470~1550)은 1529년(중종 24) 5월 25일 국왕에게 서사(書肆) 설치를 거듭 주장했다.(『중종실록』, 중종 24년 5월 25일자) 하지만 중종은 거듭된 제안에도 불구하고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명종시절에는 윤춘년(尹春年·1514~1567)이 서사를 세우자는 주장을 제기했다. 이후 정상기(鄭尙驥)와 박제가 역시 서점 개설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렇다고 서울에 책 파는 서점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영조 시대에는 이인석과 박섬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약계책방이란 곳이 서소문에 있었다. 조희룡이 조신선을 만난 곳도 박도량이란 사람이 운영하는 서점이었다. 이처럼 조선 전기부터 서울에서는 서점이 영업을 하고 있었다. 또 지방의 큰 도읍에도 서점이 생겼다. 유몽인(柳夢寅)은 『어우집(於于集)』(후집, 권4, 「박고서사서(博古書肆序)」)에서 전라도 남원에 박고서사(博古書肆)라는 서점이 세워지기도 했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서점이 전반적으로 활성화되지 못하여 서적 유통은 거의 전적으로 서쾌에게 맡겨졌던 것이다.
그러면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서쾌인 조신선은 어떤 인물로 묘사되고 있을까?
우선 다산에 따르면 조신선은 “붉은 수염을 한 사람으로 우스갯소리를 잘했으며, 눈에는 번쩍번쩍 광채가 번득였다”라고 언급했다.
『흠영(欽英)이라는 일기로 유명한 유만주(兪晩柱·1755~1788)의 기록을 잠시 보자. 그는 “책쾌 조 씨가 『합강』 전질을 가지고 왔다. 헤아려보니 『휘강(徽綱)』이 30책, 『속강(續綱)』이 14책, 『휘강발명(徽綱發明)』이 4책으로, 합하여 48책이었다. 환약 먹기를 중지하고 그 값으로 이것을 사려 한다. 먼저 『월강(越綱)』 값을 지불했다.(1784년 10월 10일자 일기) 유만주의 일기에는 이 외에 몇 차례 더 조 씨에게 책을 구입한 기록이 있다.
이처럼 유만주의 일기에는 주요 고객에게 책을 소개하고 가져다 판매하는 전형적인 책장수의 행적을 고스란히 밝히고 있다. 1784년 11월 9일의 일기에는 주요한 서적을 누가 샀고, 어떤 책을 누가 소장하고 있으며, 책을 구할 수 있는지 없는지 등등 책 사고팔기에 관한 소상한 정보를 고객에게 제공하는 조신선의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조신선이란 사람이 어디 출신이며 어디에 사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나이를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도 그 부분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책에 대한 것이라면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가 서적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면 그 해박함에 사대부 선비들도 감탄을 자아내곤 했다.
또한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기인으로 통했다. 그는 어디를 가든 걷지 않고 늘 뛰어다녔다. 저잣거리로, 골목길로, 서당으로, 관아로 뛰어다녔다. 그의 모습이 보이면 아이들과 하인들은 모두 “조신선이다”라고 소리를 지르며 신기해했다.
1771년 어느 날 조신선이 여러 사람들에게 “일이 있어 영남 땅에 갔다가 몇 년 뒤에 올 겁니다”라고 인사를 하고 종적을 감추었다. 그 뒤 청나라 사람 주린(朱璘)이 지은 『명기집략(明紀輯略)』이 조선의 태조와 인조를 모독한 내용이 있다고 하여 그해 5월 영조가 대신들과 대책을 논의한 후 그 책을 북경에서 들여온 사람들은 물론 그 책을 소장하거나 판매한 책쾌 등을 귀양 보내거나 죽였다. 대표적인 이가 연암 박지원의 친구이자 촉망받는 젊은 학자인 이희천(李羲天·1738~1771)이었다. 그는 그 책을 소장한 죄로 정립·윤혁 등의 선비와 배경도 등의 서쾌와 함께 그해 5월 26일 청파교에서 목이 베이는 참형을 당했다.
나라 안의 모든 책장수가 죽게 된 이 사건은 『실록』을 비롯하여 각종 야사에 많이 등장한다. 수많은 서쾌가 피해를 보았지만 당시 가장 유명했던 서쾌였던 조신선은 먼 지방으로 피신해 명단에 오르지 않았다. 사건이 끝난 지 한 해 남짓하여 조신선이 다시 서울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서 그는 그 뒤에 사람들에게 신선으로 불리기도 했다. 정약용이 조 씨에 대한 이야기를 전 형식으로 쓴 글에 수록되어 있다. 정약용은 조 씨가 책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고, 신선의 면모를 보여서 조신선으로 일컫고 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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