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인 18세기에 만 스무 살에 시작해 서른네 살 생일을 며칠 앞두고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일기를 쓴 이가 있다. 유만주(兪晩柱·1755~1788)가 그 사람이다. 그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로, 호가 통원(通園) 또는 흠영(欽英)이다. 부친은 익산군수와 부평군수 등을 지낸 유한준(兪漢雋·1732~1811)이다.
유만주는 과거에 합격하지 않아 벼슬을 하지 않았고, 특별한 저서도 없으니 당연 가난하게 포의 선비로서 생활했다. 하지만 그는 스물네 권의 일기장을 남겼다. 여기에는 그의 개인적 내면은 물론이고 18세기 조선의 면면을 이해하는데 소중한 자료가 담겨있다.
그러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간단하게 살펴보자. 요즘 사람들 말로 신상을 먼저 파악해보자는 것이다.
유만주는 1755년 2월 2일 부친 유한준과 순흥 안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후사 없이 요절한 백부 유한병(兪漢邴)의 양자로 입적됐다. 그의 나이 14세 되던 해 부친이 진사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유만주는 오재륜의 장녀 해주 오씨와 혼례를 치렀다. 그의 나이 19세인 1773년 5월 9일에 장남 구환(久煥)이 태어났으나, 5월 16일에 아내가 출산 후유증으로 숨졌다. 이듬해 박치일의 장녀 반남 박씨와 재혼하였다. 그해 겨울에 벗인 임노(任魯·1755~1828)의 집에서 함께 글공부를 하다 새해부터 일기를 쓰기로 서로 약속하여 21세인 1775년 1월 1일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임노는 친구인 유만주가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 세상을 버리자 그의 방대한 일기를 3년간 읽고 정돈하여 『통원유고』라는 필사본 문집으로 묶어냈다. 임노의 덕으로 유만주의 일기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유만주는 1775년부터 1787년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썼다. 그는 이 일기를 ‘흠영’(欽英)이라 불렀다. ‘흠영’은 ‘꽃송이와 같은 인간의 아름다운 정신을 흠모한다“는 뜻이다.
그는 과거공부를 계속하고 시험을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조선왕조실록』이나 생원시·진사시의 합격자 명부인 『사마방목』에도 그의 이름이 검색되지 않는다.
그러면 그는 왜 오랜 기간 일기를 썼을까? 24권 첫머리에 적힌 그의 글을 통해 일기를 그렇게 꾸준히 쓴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나에게는 원시(元視·첫아들 유구환의 자)라는 아들이 있었다. … 이 일기를 남겨 주어 박문다식(博聞多識)한 사람이 되는 데 도움이 되게끔 하려 했다. 내가 남겨주는 이 일기는 비록 옛사람에 비추어 본다면 부끄러운 것이겠지만 노비나 전답, 금은보화 같은 걸 남겨 주는 데 비한다면 그래도 좀 낫지 않을까 싶어, 날마다 일기 쓰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과거에 합격하지 못해 벼슬을 하지도 못한 데다 변변한 문집을 출간할 처지가 되지 않자 자신이 쓰고 있는 일기를 통해 아들 교육의 텍스트로 활용하기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한 것이다.
하지만 유만주가 33세이던 1787년 5월 12일에 첫아들 구환이 병을 앓다 15세로 죽었다. 첫아들이 죽자 그는 심한 자책감에 시달렸다. 그는 5월 17일 이래 일기를 쓰지 못했다. 그러다 5월 25일에 아들의 꿈을 꾸곤 비로소 일기를 다시 썼다.
아들이 죽은 지 9개월이 지나고 일기를 그만 쓴 지 한 달 남짓 지난 1788년 1월 29일, 유만주는 창동의 자기 집에서 조용히 죽음을 맞았다.
그러면 13년간 쓴 그 일기에는 어떤 내용들이 담겼을까? 물론 일기는 사적인 기록이니 글쓴이의 다양한 일상이 당연 들어있다. 거기에 자신이 보고 들은 당대의 사회상과 문화상도 가감 없이 기록돼 있다.
이를테면 1776년 6월 29일자의 일기 내용을 보자.
“중국의 풍속에는 아버지가 농민이나 상인이어도 아들이 현달한 관리가 되고 행여 높은 벼슬아치일지라도 아우는 호미를 메고 농사를 짓는 경우가 간혹 있으니, 높은 신분이 그대로 세습되지 않고 낮은 신분도 그대로 세습되지 않는다. 일본도 그런 편인데 유독 우리나라만 등급의 격차가 뚜렷하여 사족(士族)이라는 이름이 붙으면 비록 가난해 굶어죽을지언정 차마 수공업과 상업 등의 하찮은 일을 할 수가 없고, 서민이라는 이름이 붙으면 비록 현명하고 재능이 있어도 감히 높은 벼슬 같은 건 바라볼 수 없다. …”(김하라 편역, 『일기를 쓰다-흠영 선집』 참조)
물론 위 내용이 반드시 정확한 것은 아닐지라도 유만주가 보기에는 조선의 직분 세습이 문제가 많았다. 그러니까 일기를 통해 당대 사회상을 꼬집은 것이다. 1782년 2월 3일자의 일기에도 연줄을 통해 지방 수령이 된 경우 그 혜택을 준 사람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공무는 뒷전이고 물자와 재무, 식품 담당이 되어버린다고 풍자하고 있다. 1782년 10월 29일자에서는 “지금 사대부들에게 명분과 절개는 쓸어버린 듯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작은 이익이나마 보게 되면 그저 못할 일이 없다. 못할 일이 없으니 애초에 나랏일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라며, 탄식을 하고 있다.
독서가이자 재야사학자이기도 했던 유만주의 일기는 200년 만에 세상의 주목을 받고 있다. 다른 사료들이나 문집에는 나오지 않는 당대 사람들의 면면이나 미시적인 사회상이 상세히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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