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보는 사람이야기(56)-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의 불행한 가족사

병자호란 때 중국 심양에 인질로 가 9년 만에 귀국한 세자
부왕께 인정 못받고 자신은 급사, 빈은 죽임, 아들 셋 유배

조해훈1 승인 2020.10.24 23:22 | 최종 수정 2020.10.25 11:02 의견 0

우리나라 역사에서 개인은 물론이고 가족 전체가 비극적 삶을 산 경우가 많다. 역사에 기록된 경우는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지만, 민초들은 그렇지도 못하고 역사 속에 흔적도 없이 묻힌 경우가 허다하다.

왕의 아들인 세자로 불행한 생을 살다 본인이 급사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아내와 세 아들도 시아버지이자 자식들의 할아버지에 의해 사사(賜死)되거나 유배돼 죽게 된 일이 있었다. 바로 조선 제16대 왕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昭顯世子·1612~1645)와 그 가족 이야기이다. 그 스토리를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본명이 이왕으로, 영돈녕부사 서평부원군 한준겸의 딸인 인열왕후 한 씨의 맏아들로 태어난 소현세자는 16세인 1627년(인조 5) 참의 강석기의 딸인 강 씨와 혼인했다. 두 사람은 경선군 이석철(1636~1648), 경완군 이석린(1640~1648), 경안군 이석견(1644~1665), 경녕군주(1642~1682), 경순군주(1643~1654) 등 3남 3녀를 두었다.

그러면 먼저 소현세자의 불행에 대해 먼저 살펴보겠다. 그는 14세인 1625년(인조 3) 정월에 왕세자로 봉해졌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부친인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하였다. 그러나 결국 인조가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 가 청 태종에게 굴욕적인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한 뒤 ‘성하(城下)의 맹약’을 맺었다.

청나라는 맹약에 따라 소현세자와 세자빈 그리고 소현세자의 동생인 봉림대군 등을 인질로 하고, 척화의 주모자들을 잡아 철군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소현세자는 중국 심양에 있으면서 단순한 인질이 아니라 양국 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여러 역할을 하였다. 또한 북경에 가 독일인 천주교 신부인 아담 샬(Schall, J. A.,)과 친교를 맺어 서양문물을 적극 수용하였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가 본국에 보낸 장계.
병자호란 때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가 본국에 보낸 장계.

그러나 조정에서는 세자의 처사를 친청(親淸)으로 해석하였으며, 또한 막대한 경비를 고국에 부담시키는 등의 이유로 인조는 후계자로서 썩 내키지 않는다고 여긴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그러한 여러 이유로 세자는 9년간의 인질생활 끝에 1646년 2월 18일에 입경하였으나 환영을 받지 못하였다. 인조는 세자 일행이 북경에서 가져온 서양 문물에 대한 서적과 물자에 대해서도 매우 못마땅해 하였다.

뜻하지 않은 부왕과의 갈등으로 소현세자는 입국 두 달 만인 그 해 4월 23일 병석에 누웠다. 세자는 병석에 누운 지 4일 만인 4월 26일에 34세로 급사하였다. 『인조실록』에는 시신은 9혈에서 피가 나왔으며, 진한 흑색으로 변해 있었다고 하여 은연중에 독살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실록에 따르면 종실이었던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가 세자의 염습에 참여했다가 증언한 내용이 있다. 그녀는 얼굴이 온통 피로 물들어 얼굴빛이 검어도 주위 사람들이 이를 눈치 채지 못한 것 같다고 언급하였다(인조 23년 6월 27일).

소현세자의 무덤인 소경원. 경기도 고양시에 있다. 출처=문화재청 홈페이지
소현세자의 무덤인 소경원. 경기도 고양시에 있다. 출처=문화재청 홈페이지

인조는 조소용이라는 첩을 사랑하였는데, 그녀가 세자빈을 질시하였다. 한편 세자를 치료하였던 의관 이형익은 조소용의 외가에 출입하던 인물로 3개월 전에 특채되었다. 그런데 인조는 소현세자의 사인을 구명하려 하지 않은 데다, 의관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여론도 무시하고 서둘러 입관시켰다.

소현세자가 죽은 후 인조는 세손인 이석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이듬해인 1646년(인조 24)에는 조소용을 저주하고 임금의 음식에 독약을 넣었다는 혐의을 씌워 소현세자의 빈 강 씨를 죽였다. 인조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다음해인 1647년에 소현세자의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 세 명을 모두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 당시 12세와 8세였던 이석철과 이석린은 이듬해 제주도에서 죽었고, 4세였던 이석견은 13세인 1656년(효종 7)에야 유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22세에 죽고 만다.

소현세자와 그 가족의 불행한 죽음은 일반인들에게 그다지 많이 알려진 편은 아니다. 이처럼 인조가 며느리인 세자빈 강 씨와 손자들에게 너무나 가혹하게 대한 것을 두고 지금도 역사학계에서는 소현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에 인조가 관련되어 있는 건 아닌가라는 의심을 하고 있다.

인조실록의 편찬자가 소현세자 죽음에 의혹을 제기하면서 조소용이 세자 내외를 평소 인조에게 무함했던 일을 함께 거론한 것은 어떤 이유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역사·고전인문학자 massjo@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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