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년인 1777년 7월 28일 밤 11시 무렵 정조가 머물던 경희궁 존현각에 자객이 지붕 위까지 침입한 사실이 발각됐다. 정유년에 일어난 반역 사건이라 하여 ‘정유역변’ 또는 ‘정조 시해 미수 사건’으로 불린다.
우포도대장 구선복은 그로부터 며칠 뒤인 8월 9일 밤 임금을 암살하기 위해 서쪽 담장을 넘던 범인을 붙잡았다. 이 사건으로 암살을 주도한 남양 홍씨 가문의 홍상범(미상~1777)의 시체를 거리에서 찢어 죽이고, 연루된 인물들 역시 모두 사형시켰다. 당시 홍상범은 아버지 홍지해를 귀양 보낸 정조에게 불만을 가져 장조(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전군 이찬을 추대하려고 했다는 역모 사건이다.
정조의 암살 위협에 대한 기록은 정조가 신하들에게 명하여 편찬한 『명의록』과 『속명의록』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 『속명의록』은 정조 즉위 초 홍상범 등의 역모사건을 1777년 7월부터 1778년 2월까지 순차적으로 사건의 처결사항을 상술한 다음 정신(庭臣)들의 이에 대한 의견을 적은 것이다.
여하튼 이번 글의 주인공이 조정철(趙貞喆·1751~1831)이므로, 그에 집중해 이야기를 풀어나가겠다. 영조 시대에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가는데 앞장섰던 인물 중 한 사람으로 홍계희가 지목되고 있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홍계희의 아들인 홍지해와 손자 홍상범을 중심으로 정조 시해를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8촌인 홍계능과 홍상범의 사촌 홍상길이 주동이 된 또 다른 시해모의가 발각됐다는 것이다.
정조 시해모의를 조사하던 중 “홍지해의 사위인 조정철의 집에 홍상범의 여종이 드나들며 부인 홍 씨와 만났다”는 자백이 나온다. 1775년 대과에 급제한 조정철의 장인이 홍지해였다. 이 일련의 사건으로 조정철의 부인 홍 씨는 자신의 친정 때문에 시댁이 곤란을 겪게 됐다는 자책감으로 8개월 된 아들을 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조정철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가 과거 급제한지 3년째 되던 27살 때였다. 조정철의 죄가 참형에 해당했으나 충신이었던 증조부 조태채(趙泰采·1660~1722)를 감안한 처결이었다.
하지만 제주 유배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제주판관으로 정래운이 개인적인 원한을 드러내며 도착한 날 함께 온 종을 잡아가두고 양식 얻는 것까지 방해했다. 때로는 책 읽는 것을 금지하기도 하고, 큰비가 내리는 가운데 급박하게 거처를 옮기기도 했다.
이렇게 시작된 조정철의 유배생활은 1777년부터 시작해 1807년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조정철은 정유역변과 관련해 29년의 유배생활을 했으며, 이중 제주에서 27년을 살았다.
제주 유배생활 중에 그에게 위로가 되었던 이가 홍윤애(洪允愛·?~1781)다. 그녀는 향리 홍처훈의 딸이었다. 조정철이 제주 유배생활을 시작하고 3년이 되던 해인 1779년부터 그의 처소에 드나들며 시중을 들었다. 그리고 1781년에는 그의 딸을 낳았다.
1781년(정조 5) 조정철의 할아버지 때부터 정적이었던 소론의 김시구(金蓍耉)가 제주목사로 부임하였다. 김시구는 조정철을 죽일 죄목을 찾던 중 귀양지에 홍윤애가 출입하는 것을 알고 그녀를 잡아다가 음모 여부를 문초하였다. 그녀는 그해 2월 30일 딸을 낳은 상태였다. 그러나 홍윤애는 모든 사실을 부인하였고, 끝내 죽음으로 조정철을 변호하였다. 딸을 낳고 두 달 뒤에 죽은 것이다.
김시구는 죄상을 밝힐 증거도 없이 사람을 죽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제주도 유배인이 역모를 꾸민다는 허위 보고를 올렸다. 이에 조정은 제주목사 및 대정현감, 정의현감을 새로 임명하고, 어사를 파견하여 조사하였다.
『조선왕조실록』(정조 5년, 1781년 6월 15일자)을 보면 제주 목사 김시구는 파직되고, 조사 후 귀양을 갔으며, 1795년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조정철은 혹독한 신문을 받은 끝에 무혐의로 풀려나 1782년 1월 정의현으로 이배되어 그곳에서 9년의 세월을 보내고, 다시 1790년 9월 추자도로 이배되어 13년의 세월을 보냈다. 순조 즉위 후인 1803년에 내륙인 전남 광양으로 옮겨졌다가, 1805년 3월에 구례로, 1807년 5월에 황해도 토산으로 이배되었다가 그해 석방되어 관직에 복귀했다.
그가 얼마나 질곡의 삶을 살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1811년에 자청하여(?) 제주목사 겸 전라방어사가 되어 제주에 부임했던 것이다.
제주 목사로 1년간 재직한 조정철은 홍윤애가 낳은 자신의 딸을 만났다. 또한 홍윤애의 묘를 찾아 무덤을 단장하고, ‘洪義女之墓(홍의녀지묘)라 새긴 비석을 세웠다. 비석 뒷면엔 홍윤애와의 인연, 죽게 된 사연을 적고 7언 시 두 수를 적었다. 조선시대 사대부가 여성을 위해 세워준 유일한 비문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또한 홍윤애가 낳은 자신의 딸 가족을 호적에 올려 돌보았다. 이런 사정은 조정철의 시집 『정헌영해처감록(靜軒瀛海處坎錄)』에 상세히 전하고 있다.
홍윤애의 가계는 고려 말 정승을 지낸 홍언박(1309~1363)의 후예로 고려시대에 여러 대에 걸쳐 정승과 대신을 배출한 높은 문벌이었다. 15세기 초 손자 홍윤강이 제주에 유배 온 이후로는 조정에 나가지 않고 은거하였다. 홍윤애의 부친 홍처훈은 입도시조인 홍윤강의 13세손이다. 홍랑은 비록 몰락한 선비의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매우 총명하고 사리에 밝아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홍윤애의 무덤은 원래 제주시 삼도1동 전농로 불교회관이 있는 자리에 있었다. 그러다 1936년 이곳에 제주농업학교가 들어서면서 애월읍 금덕리로 이장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6대 외손으로, 애월읍 곽지리에 거주하는 박인선 씨가 묘를 관리하고 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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