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의 고서로 풀어보는 사람 이야기(57) - 『고려도경』을 저술한 송나라 사신 서긍

한 달간 고려 머물며 보고 들은 내용 40권 황제에 바침
김부식 동생 김부철 요청, 宋 서화 뛰어난 서긍 발탁돼
유약한 宋, 고려군 파병 가능 여부 판단 목적 저술 명령

조해훈1 승인 2020.11.14 11:18 | 최종 수정 2020.11.14 14:33 의견 0

우리는 『고려도경(高麗圖經)』이란 책 이름을 중·고교시절에 들어 알고 있다. 고려시대에 서긍이란 송나라 사신이 쓴 것 정도로 기억한다.

고려도경은 송나라 황제 휘종의 명으로 1123년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서긍(徐兢·1091~1153) 이 귀국 후 황제에게 지어 올린 책으로, 정확한 책 이름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이다. 그가 고려에 와서 한 달 동안 보고 듣고 한 사실들을 기록한 책이며, 4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려도경(高麗圖經)』 표지

서긍은 1124년 6월에 지금의 호북성 무한(武漢) 강하구(江夏区)에서 태어났으며, 대대로 관리집안이었다. 그의 자(字)는 명숙(明叔)이고 호는 자신거사(自信居士)이다.

서긍은 대단한 안목과 기억력, 그리고 관찰력을 가진 인물임에 틀림없다. 요즘 아이들 말로 핸드폰도 없이 어떻게 촬영한 것처럼 그렇게 다 묘사를 하였는지 감탄을 자아낼 뿐이다.

서긍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잠시 보겠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의 아우 김부철(후에 김부의로 개명)이 1111년 서장관으로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글씨 잘 쓰는 신하를 사신으로 보내 달라는 청을 하였다. 이에 송나라 황제가 서긍을 예물관(禮物官)으로 파견하였던 것이다.

김부철은 1097년 19세로 문과에 급제한 인물로 송나라에 가서 문명(文名)을 떨치고 돌아온 바 있다. 서긍도 “부식(富軾)과 아우 부철(富轍)이 시를 잘 쓴다는 명성이 있다”라고 한 것으로 볼 때 김부철이 문장이 뛰어난 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서긍은 그림에도 재주가 있었던 것 같다. 송나라 유학자 주희(朱熹)가 서긍의 그림에 붙인 제화시(題畵詩)가 있다. “뭇 봉우리들 서로 이어져 있지만/ 끊어진 곳에서 가을 구름 피어나네./ 구름 피어난 곳 산 더욱 깊어지니/ 지척이 근심천리로다(群峰相連接, 斷處秋雲起. 雲起山更深, 咫尺愁千裏.)”(『회암선생주문공문집』권2, 「제가노소장명숙화권(題可老所藏明叔畫卷)」). 이를 볼 때 서긍은 글 뿐 아니라 그림에도 뛰어났던 것으로 충분히 짐작이 된다.

서긍은 1123년(고려 인종원년) 정사인 노연적과 부사인 전묵경을 수행하여 ‘국신소제할할인선예물관(國信所提割轄人船禮物官)’의 자격으로 고려에 건너왔다. 그가 맡은 직책에서 ‘국신소제할할인선’은 황제의 칙서를 운반한다는 의미이며, 예물관이라 함은 고려의 죽은 예종을 조위(弔慰)하고 새로 즉위한 인종을 경하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서긍의 지위는 정사와 부사 아래의 서기관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서긍은 평범한 말단직 서기관이 아니라 서예로 일가를 이루어 특별히 선발된 인물이었다. 그는 휘종 앞에서 ‘진덕수업(進德修業)’ 네 글자를 쓴 바 있는데, 이를 볼 때도 당대에 이미 그가 글씨로써 상당한 평가를 받고 있었음을 반증한다. 그러니까 그는 당대 송나라에서 서화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서긍이 사행단에 참가하게 된 이유는 문사이면서 빼어난 서화(書畵)실력을 갖추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서긍은 왜 고려도경을 저술하였을까? 그건 당시 송나라가 금나라와 요나라, 고려와의 국제정세 속에서 고려가 과연 송을 도울 능력이 되는지를 염탐하기 위한 목적에서 진행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서긍이 사신으로 오게 되는 1120년을 전후한 송나라-요나라-금나라-고려의 국제정세는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여진족인 금을 중심으로 급속도로 재편되고 있었다. 송나라는 서하(西夏)와 요나라의 공격을 엄청난 양의 세폐(歲幣)를 바치는 방법으로 힘겹게 막아내고 있었다. 그래서 문약했던 송 왕조는 고려의 군사적 지원을 간절히 원했었다.

그리하여 고려가 과연 송을 도와줄 형편인지, 또 그럴 의지를 가지고 있는지 여부를 휘종이 알고 싶어 했을 것이다. 정치적 담판은 정사와 부사가 실질적으로 맡았을 가능성이 크다. 반면 서긍은 특유의 관찰력과 필력으로 군사력, 문물제도, 문화생활 등 고려의 이모저모를 샅샅이 기록하고, 그림으로 묘사하였다. 그 결과물이 고려도경인 것이다.

서긍 일행은 1123년 3월 14일 현재의 하남성 개봉(開封)인 수도 변경(汴京)을 떠났다. 이후 배로 닷새만인 6월 2일 고려 영해에 들어왔다. 흑산도를 비롯한 서해안의 여러 섬들을 거쳐서 6월 12일, 당시 개경으로 들어가는 국제항이었던 예성항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이튿날 육로를 따라 개경에 도착함으로써 한 달 간의 사행 일정을 시작했다.

서긍은 고려에 와서 머무른 기간은 한 달밖에 되지 않지만 고려도경에는 그 어느 자료보다 풍부하고 상세한 내용이 들어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고려도경은 제목 그대로 그림이 중심이고 그 그림에 설명을 곁들인 책이지만 현재 남아있는 책에는 그림이 일실되어 있다. 현재 전해지는 고려도경 40권은 1167년에 서긍의 조카 서천이 간행한 건도본이 저본이다. 이후 여

러 과정을 거쳐 1793년 포정박이 가장초본(家藏抄本)과 명나라 정홍본을 근거로 교감하여 만든 지부족재총서(知不足齋叢書)와 1932년 중국의 고궁박물원에서 편찬한 『천록임랑총서(天祿琳琅叢書)』 제1집에 영인된 고려도경이 선본(善本)으로 인정받고 있다. 고려도경은 고려전기의 정치나 경제, 외교는 물론 항해술 및 해상교류사, 복식사, 건축사 등 문화사적인 측면에서 더욱 주목받아 온 것이 사실이다.

서긍은 고려도경을 저술한 공으로 왕으로부터 상을 받았으며, 대종승을 거쳐 장서학을 역임하였다. 서긍은 지금의 안휘성 화현인 역양(歷陽)에 오랫동안 살았으며, 그가 관직에서 은퇴한 뒤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역사·고전인문학자 / 교육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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