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보는 사람이야기(62)-6대에 걸쳐 150년간 살아온 육조판서 홍경모의 집

홍경모, 6대 살던 사의당 기록 모아 『사의당지(四宜堂志)』 편찬
정명공주와 결혼한 홍주원 건축 아들 만회에 물려줘 거주 시작

조해훈1 승인 2020.12.19 17:13 | 최종 수정 2020.12.19 18:40 의견 0

집이란 무엇일까? 기본적으로 사람이 사는 주거공간을 말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주거의 목적 외에 다양한 의미가 담겨 있다. 가족들의 생활 형태는 말할 것도 없고, 어떠한 부류(계층)의 사람들이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문화공간이다. 또한 그 집의 식구들이 어떤 음식을 먹으며, 어떠한 예절을 지키며 생활하는지 등 삶의 모든 철학이 포함된 총체적인 공간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집이 또 하나의 기능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 바로 투자 내지는 투기의 대상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집과 관련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조선 후기 경화세족은 어떠한 주거공간에서 살았는지 한 번 살펴보기로 했다. 부러워할 것도 비난할 것도 없다. 청나라의 문물과 문화가 물밀듯이 밀려들어오던 그 시대의 문화를 대변하는 척도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경화(京華)’란 임금이 사는 서울을 말하고, ‘세족(世族)’은 특정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대대로 살아가던 양반층을 가리킨다.

'사의당지' 수록된 '관암전서'.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의당지' 수록된 '관암전서'.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 글에서 소개할 사람의 집은 육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한 홍경모(1774~1851)의 ‘사의당(四宜堂)’이다. 그는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문장에도 뛰어난 홍양호(1724~1802)의 손자이며, 홍낙원의 아들이다. 홍경모는 자신에 이르기까지 6대가 살던 진고개의 사의당에 대한 기록을 모아 『사의당지(四宜堂志)』를 편찬했다. ‘사의당지’는 그의 문집인 『관암전서(冠巖全書)』이 실려 있는 여러 저술 중 하나이다.

여하튼 사의당은 진고개에 있던 남영 홍씨 집안의 저택이다. 지금의 서울 충무로 2가 중국대사관 뒤에 있는 언덕길을 진고개(泥峴)라고 하였는데, 바로 그곳에 위치해 있었다. 사의당은 원래 명례궁(明禮宮) 자리에 있던 집이다. 이 집은 어찌하여 무반으로 훈련원정 등의 관직을 지낸 이책(李策)에게 넘어갔다.

그후 인조반정(1623)이 일어난 그해 9월 26일 선조와 인목대비 사이에서 태어난 정명공주가 홍주원(洪柱元·1606∼672)과 혼례를 치렀다. 인조는 정명공주가 살던 저택 외에 이책 소유의 집도 구입하여 하사하였다. 정명공주는 이를 넷째 아들 홍만회(洪萬恢·1643∼1709)에게 물려주었다. 1671년 홍만회는 집을 새로 짓고 그 이름을 사의당이라 한 것이다.

그 후 사의당은 홍중성(洪重聖)-홍진보(洪鎭輔)-홍양호-홍낙원-홍경모에게 차례로 상속되었고, 178년 한 차례 중수된 바 있다. 사의당은 홍만회부터 홍경모에 이르기까지 6대 150여 년의 세월 동안 도성의 이름난 저택으로 명성을 떨쳤다.

홍경모는 사의당이 건축된 1671년부터 146년이 지난 후 『사의당지』를 편찬하여 보완작업을 거쳐 7년 후인 1824년에 완성하였다. 이 책을 통해 사의당의 구조를 알 수 있다.

사의당에 살면서 금석문 등 글씨와 귀한 기물을 많이 수집한 홍양호 초상.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의당에 살면서 금석문 등 글씨와 귀한 기물을 많이 수집한 홍양호 초상.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먼저 본채인 정당(正堂)은 100칸짜리 건물이었다. 정당의 서쪽에는 1칸짜리 수약당(守約堂)이 있었다. 이 수약당은 18세기 시회(詩會)의 장소로 유명했다. 홍만회의 아들 홍중성이 이곳에서 조유수·이병연·김창흡·조문명·윤순·홍세태 등과 시사(詩社)를 결성하여 날을 정하여 술을 장만하여 수창하였다.

정당과 함께 사의당 역시 중심이 되는 건물이었다. ‘사의당’ 편액은 송시열이 썼다. 사의당 앞쪽에는 화원을 두었는데 산기슭에 위치해 있어 매우 높았으므로 사방이 탁 트여 조망이 뛰어났다.

사의당에는 홍양호가 장만한 많은 서화가 있었다. 홍양호의 사돈인 윤동석은 한나라 대 이전의 금석문을 널리 수집하여 당대 최고의 금석문 수집가였다. 홍양호는 당대 윤동석과 함께 고대 금석문의 최고 전문가였다. 홍양호는 중국의 옛 탑본뿐만 아니라 조선의 고비(古碑)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리하여 당대에 잊혀진 상당수의 비석이 그의 노력에 의하여 발굴되었다. 홍양호는 우리나라 역대 명필의 글씨를 두로 수집하였으며, 왕실의 필첩류(筆帖類)도 상당수 소장하였다. 홍양호가 서예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그의 증조부 홍만회가 글씨에 관심을 가졌던 내력이기도 하다. 홍만회는 글씨에 관심이 많아 『대동필종(大東筆宗)』을 편찬한 바 있다. 특히 부마 홍주원의 부인 정명공주는 글씨에 뛰어나 정조가 그녀의 글씨 ‘화정’을 보고 칭찬할 정도였다.

홍경모는 홍양호로부터 물려받은 우리나라 고비의 탑본과 함께 ‘여산폭포시진적(廬山瀑布詩眞蹟)과 ’광평사석당(廣平寺石幢)‘ 등 몇 종을 더하여 『동국묵적(東國墨蹟)』으로 묶었다.

사의당에 6대 150년간 주거한 기록인 '사의당지'를 편찬한 홍경모의 간찰.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의당에 6대 150년간 주거한 기록인 '사의당지'를 편찬한 홍경모의 간찰.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의당에는 진기한 기물도 많이 소장되어 있었다. 이 집안의 기물은 정명공주에게서 비롯된 것이 많았다. 사의당에 소장된 기물 중에는 홍양호가 1794년 중국 사신으로 청나라에 갔을 때 기윤(紀昀)으로부터 선물 받은 것도 상당수에 이른다.

『사의당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주거 문화는 19세기 이름난 집안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19세기 조선에서 가장 뛰어난 저택으로 여러 기록에 등장하는 심상규(沈象奎·1766∼1838)의 송항(松巷) 북쪽에 있던 가성각도 그 중 하나이다.

어쨌든 사의당을 비롯한 경화세족들의 대저택이 소장했던 그림과 글씨, 다양한 기물들은 19세기 조선의 문화를 발전시킨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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