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보는 사람이야기 (53)‘소신을 가졌다’는 이유로 죽음을 맞은 어우담 유몽인

장원급제, 세 차례 明 다녀온 출충한 인재
임난 때 광해군 호종하며 수많은 공 세워 
인목대비 폐모론 반대, 인조반정 후 죽음

조해훈1 승인 2020.10.02 16:46 | 최종 수정 2020.10.02 20:16 의견 0

어우담 유몽인(柳夢寅·1559~1623)은 명종 14년에 태어나 인조반정이 일어난 그해에 죽임을 당했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정치적 대립이 극에 달하던 때였으므로, 유몽인의 죽음은 정치싸움의 와중에 희생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파적 희생물이 된 문사들은 사람마다 경우가 조금씩 다를 수 있다. 그는 어떤 사정으로 죽음을 맞게 된 것인지 한 번 살펴보겠다.

알다시피 유몽인은 한성부좌윤과 대사간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어유야담(於于野談)』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광해군 재위 때 집권세력이었던 북인(北人) 소속이었다.

여기서 조선시대의 당파에 대해 잠시 알아보고 넘어가겠다. 필자에게 가끔 조선시대의 당파에 대해 질문을 하는 독자가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사색당파로 말미암아 나라가 더 혼돈에 빠졌다는 말을 흔히 한다.

그러면 사색당파란 무엇일까? 이를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조선중기인 선조 때부터 사상과 이념의 차이로 나눠져 나라의 정치를 좌지우지한 네 당파를 일컫는다. 즉 노론·소론·남인·북인을 이른다.

유몽인의 저서인 [어우야담].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유몽인의 저서인 [어우야담].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조선 중기의 정파를 간략하자면 다음과 같다. 동인(東人)이 16세기 후반에 성립됐는데, 여기서 북인과 남인으로 갈라졌다. 따라서 유몽인이 속했던 북인은 남인과 함께 동인에서 분파됐으며, 이발과 이산해가 중심인물이었다.

그러면 동인은 왜 분화됐을까? 동인은 1589년(선조 22) 정여립의 반란사건으로 서인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 하지만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자는 건의를 했다가 선조의 미움을 받아 서인이 실각하자 다시 동인이 실권을 잡았다. 그런데 정철의 처벌 수위를 놓고 정인홍 등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와 유성룡 등의 온건파의 주장이 대립됐는데, 이들이 각각 북인과 남인으로 갈라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학통이 당파가 됐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학통상으로 이황과 조식, 서경덕의 제자들이 중심이었던 동인 중 이황의 제자들이 주로 남인이 됐으며, 조식 및 서경덕의 제자들이 북인이 됐다. 북인의 영수가 조식의 수제자인 정인홍이었다.

유몽인이 북경에 사신으로 가는 이정구(李廷龜)에게 주기 위해 쓴 글. 출처=성균관대학교 박물관
유몽인이 북경에 사신으로 가는 이정구(李廷龜)에게 주기 위해 쓴 글. 출처=성균관대학교 박물관

자, 그러면 다시 유몽인 이야기로 돌아가자. 30세(선조 22)인 1589년 증광시에서 장원으로 급제했던 그는 중국에 세 번이나 사신으로 다녀올 정도로 능력이 출중했다. 임진왜란 때는 이정구·신흠과 함께 당시의 가장 뛰어난 문장가로 평가되어 명과의 외교 업무를 맡았다. 또한 전란 동안 그는 세자인 광해군을 호종하면서 큰 공로를 세우기도 했다.

전란은 끝났지만 당쟁은 계속 됐는데,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 때문이었다. 선조의 후사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어 결정돼 있었다. 그런데 선조 39년(1606)에 적자인 영창대군이 태어나면서 상황이 복잡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어쨌든 광해군은 수많은 곡절과 위기를 넘기고 1608년 제15대 왕으로 즉위했다. 선조가 승하하기 직전 도승지로 임명된 유몽인은 광해군이 왕위를 이은 후부터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유몽인의 그런 영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광해군 때의 가장 큰 논란인 인목대비 폐비 문제로 실각하고 만다. 선조의 계비로, 19세에 왕비가 된 그녀는 영창대군의 생모이다. 폐비 논란으로 수많은 인물이 희생됐다.

광해군 집권 10년 차인 1618년에 정인홍과 이이첨을 중심으로 한 집권세력인 대북(大北)은 폐비론을 제기했다. 북인은 다시 대북과 소북(小北)으로 분화된 상태였다. 북인이었던 유몽인은 친모는 아니지만 광해군의 어머니인 그녀를 대비 자리에서 폐위한다는 건 아니라며 폐모 반대편에 섰던 것이다. 같은 정파라고 해서 반드시 어떤 사안에 무조건 동조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북은 유몽인의 목을 베야 한다고 주장하자, 59세였던 그는 즉시 사직했다. 그 후 5년 뒤 죽음을 맞을 때까지 은거하거나 유람을 하였다.

경기도 가평에 있는 유몽인의 묘. 출처=한국자생풍수연구소
경기도 가평에 있는 유몽인의 묘. 출처=한국자생풍수연구소

유몽인은 64세 때인 1623년 3월 표훈사에서 인조반정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반정이 일어난 지 넉 달 만에 광해군을 복위시키려는 모의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의 아들 유약이 모의에 가담하면서 유몽인 역시 역모에 참여했다는 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한 것이었다.

유몽인은 반란의 혐의로 죽음에 이르러서도 폐모론이 등장했을 때처럼 소신을 지켰던 것으로 평가된다.

조선 후기를 살았던 뛰어난 인물 중 적지 않은 인물이 당쟁으로 희생되었던 것처럼 유몽인 역시 그런 비운을 겪었던 것이다.

<역사·고전인문학자 massj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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