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보는 사람이야기 (47)걸인청(乞人廳) 만들어 가난한 백성 구제한 토정 이지함

‘구름 먹고 바람 숨 쉬는’ 천하의 기인이자 예언가 이지함

조해훈1 승인 2020.08.05 13:06 | 최종 수정 2020.08.05 13:23 의견 0

필자가 어릴 때 친척집 등에 가면 집집마다 토정비결이란 책이 있었다. 연세 지긋하신 아저씨뻘 되는 분들이 가끔 그 책을 펴 일진을 따져보곤 하셨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토정비결의 저자가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1517~1578)이라고 알고 있다. 흔히 신년에 한 해의 신수를 보던 토정비결은 이지함이 의학과 복서에 밝다는 소문이 퍼져 사람들이 찾아와 1년의 신수를 보아 달라는 요구로 지은 책이라 이해하고 있지만, 이지함과는 관계없이 그의 이름을 가탁한 책이라는 주장이 우세하다. 토정비결은 일종의 도참서로, 태세(太歲월건(月建일진(日辰) 따위를 숫자로 따지고, 주역의 음양설에 기초하여 일 년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데 썼다.

이지함은 학자이자 문신이었지만 기인(奇人)으로 알려져 있으며, 생애의 대부분을 마포 강변(현 서울 마포 용강동 부근)의 흙담 움막집에서 살았던 팃에 토정이라는 호가 붙었다. 목은 이색의 6대손인 그는 시문집인 토정유고(土亭遺稿)(21)를 남겼으며, 아산현감 시절 걸인청(乞人廳)을 만들어 관내에 들어온 걸인들을 수용하여 먹고살도록 해준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토정 이지함 초상.
토정 이지함 초상.

그러면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았던 이지함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도록 하겠다. 본관이 한산인 그는 현령 이치의 아들이며, 북인의 영수 이산해의 작은 아버지이다. 아버지 이치는 1504(연산군 10) 연산군의 어머니 윤 씨의 복위문제에 얽혀서 일어난 갑자사화에 연루돼 진도에 유배되었다 석방되었고, 의금부 도사와 수원 판관 등을 지냈다.

이지함은 1517년 충청도 보령에서 태어나 14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맏형인 이지번에게서 글을 배웠고, 16세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이후 형 지번을 따라 서울로 거처를 옮겼으며 형의 보살핌을 받았다. 후일 이지함은 지번의 아들인 산해에게 글을 가르쳤는데, 산해가 태어났을 때 집안을 일으킬 인물이 될 것이라고 예견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장인 모산수 이정랑은 윤원형이 꾸민 양재역 벽서사건에 휘말려 태형을 받고 능지처사되었다.

이지함은 이후 서경덕의 문하에서 여러 공부를 하였으며, 스승의 영향을 받아 역학·의학·수학·천문·지리에도 해박하였다. 이지함은 틀에 매이는 생활을 거부했고, 과거에 오르려는 생각을 꿈에도 하지 않았다. 그는 평생을 나그네처럼 얻어먹고 구름처럼 떠돌아다니면서 어려운 사람을 돕고 가난한 사람들을 그의 기지와 해박한 지식으로 먹고 살도록 하는 기행만을 벌이면서 유유자적했던 것이다.

그러다 1573년 유일로 천거되었고, 15746품직을 받아 포천 현감이 되었으나 이듬해 사직하였다. 1578년 아산현감이 되어서는 걸인청을 만들어 관내 걸인들을 거둬들여 먹고 살게 해주고 노약자의 구호에 힘쓰는 등 민생문제의 해결에 큰 관심을 가졌다.

구름 먹고 바람 숨 쉬는천하의 기인이자 예언가인 이지함이 왜 환갑이 다 되도록 벼슬을 하지 않다가 다 늦어서야 높은 지위도 아닌 종6품 벼슬을 얻어 한 고을을 맡아 나아갔을까?

벼슬길에 대해 늙은 노욕이 일어나 그때야 연연한 마음이 생겼던지 아니면 조카인 영의정 이산해의 강력한 천거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고을 수령으로 내려갔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아산현감으로 내려간 이지함은 두 가지 치적을 올려 수령이 백성을 다스리는 근본 이치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하나는 전임 현감이 했던 폐단을 없애 백성들의 고통을 들어준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걸인청을 만들어 굶고 떠도는 백성들을 먹고 살도록 해준 것이다.

그러면 이지함의 개인적 성향은 어땠을까? 주자성리학만을 고집하지 않는 사상적 개방성을 보였던 그에 대해 김장생의 아버지인 황강 김계휘의 질문에 율곡 이이가 진기한 새, 괴이한 돌, 이상한 풀이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는 이지함의 기인적 풍모를 대변해 주고 있다.

이지함의 형 이지번도 잠시 벼슬길에 나갔다가 그만두고 시골에 은거하여 항상 소를 타고 강둑 위를 노닐면서 세상의 운수를 점친 기인이었다. 이지함은 쇠로 만든 갓을 쓰고 다니다가 배가 고프면 아무데서나 그 갓을 벗어서 밥을 끓여 먹곤 다시 갓을 쓰고 전국 산천을 주유하던 인물이었다.

토정 이지함의 시문집인 [토정유고](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토정 이지함의 시문집인 [토정유고](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저술을 일부러 많이 하지 않았다는 이지함의 문집인 토정유고에는 세상을 바르게 하려는 의지가 담겨있다. 송시열의 발문과 권상하의 후제(後題)가 있는 이 책은 권1에 시 1, () 1, 3, () 2, 2에 부록으로 유사(遺事제문·묘갈명·시장(諡狀) 등이 수록되어 있다.

1대인설(大人說)을 보면 대인군자의 마음가짐에 대해 논설하고 있다. 인간은 이중성을 갖고 있어 물욕과 이성의 추종 여하에 따라 선악이 구분되므로, 대인은 물질적인 사리사욕을 떠나 정의대도(正義大道)에 입각해 행동하면 목적한바 대인다운 큰 사업을 성취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피지음설(避知音說)에서는 명성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선비란 내적인 지식과 교양과 덕성만을 쌓아 실천을 중시할 따름이며, 외적인 명성에 급급해 공리주의적인 미혹에 빠진다면 도리어 불확실한 행동의 대가로 큰 재해를 당한다는 뜻을 암시하고, 역사적인 실지 인물들을 들어 예증하고 있다.

또한 이포천시상소(莅抱川時上疏)는 포천현감으로 재직할 때 재정이 극도로 피폐한 실정을 들어 그에 대한 구제책을 강구하고, 거국적인 행정에 대한 탕평책을 제시한 것이다. 이아산시진폐상소(莅牙山時陳弊上疏)의 경우는 불평등하게 부가된 군정(軍政)으로 민폐가 가중되어 아산현민들이 극심한 고초를 당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시정책을 촉구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볼 때 토정유고에는 민생을 위한 여러 고민과 방책을 제시했던 이지함의 학문과 사상이 오롯이 잘 담겨있다고 할 수 있겠다.

역사·고전인문학자 massjo@hanmail.net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