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조선시대 여러 선비의 글을 읽어오면서 오래 전부터 제산 김성탁(1684∼1747)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아마 두 가지 이유 때문인 것 같다. 첫째는 그가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아주 지극하였다는 점이다. 필자도 맏이여서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지는 않았지만, 어머니를 잘 모셔야 한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 둘째는 그가 당쟁이 심했던 당대에 스승에 대한 무고의 변을 하였다가 귀양 가 유배지에서 사망했다는 것이다. 스승에 대한 제자로서의 예를 다한 점이다.
수년 전에 제산에 대한 논문을 쓰기 위해 자료를 모으고 답사를 하였지만 여러 사정으로 작성을 하지 못하고, 그와 관련한 잡글(?)만 몇 편 발표하였다. 그러다 지리산 화개동 목압마을에 들어와 목압서사를 운영하면서 가까운 광양 섬진촌에 있는 그의 적소를 찾으려고 몇 차례 섬진강을 끼고 있는 다압면과 진월면 쪽을 돌아보았지만 그 흔적을 찾지 못하였다.
그러다 어제인 2020년 6월 27일 오후 화개장터 앞에 있는 남도대교를 건너 다압면을 거쳐서 가다 여든이 훨씬 넘었을 어르신이 매화마을 인근 도로를 지나가시길래 “18세기에 제산 김성탁 선생이 섬진촌 용선암에서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혹시 그곳이 어딘지 아십니까”라며 여쭤봤더니, “안다”라고 하시면서 가르쳐주셨다.
매화마을의 ‘홍쌍리 매실家’ 위쪽으로도 몇 차례나 올라가봤지만, 시멘트로 포장이 되어 있으나 좁은 길이 굽이굽이 이어져 있어 가다가 돌아오곤 했다. 어르신은 “그 길을 따라 계속 가면 외따로 집이 한 채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아주 오래 전에는 암자였으나 지금은 개인이 살고 있고 입간판이 없다는 것이다. ‘용선암’ 간판을 찾으려고 섬진강변 마을을 그렇게 돌아다녔어도 찾지 못한 이유는 오래 전에 암자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섬진촌이던 섬진마을은 현재 매화마을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올라가는 길이 너무 좁고 꼬불꼬불한 데다 여러 갈래로 나눠져 약간 무섭기도 했다. 끝까지 가다보니 막다른 길에 집이 한 채 있었다. C 박사님이 집필활동으로 사용하는 공간이다. C 박사님은 “18년 전에 이곳의 땅을 구입할 때는 건물도 없었고 나무와 잡초가 우거져 있었다”고 설명을 해주셨다. C 박사님은 “아마 일제 때까지는 용선암(龍仙庵)이 있다가 6·25전쟁 시기에 공비들이 사용할까봐 불태워 버린 것 같다”며, “강변이어서 용신암(龍神庵)으로도 불렸다”라고 하셨다.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 내려왔다.
1741년 신유 3월에 제산이 올린 소지(所志·관에 올리는 일종의 민원서)에 따르면 당시 유배 소재지는 전라도 광영현 섬진촌(현 전남 광양시 다압면 매화마을)이었다. C 박사님에 따르면 제산의 후손 가운데 포항의 한동대학교에 재직하시는 모 교수님이 해마다 이곳에 오시어 추념을 하셨다고 했다. 그 교수님에 대해서는 필자가 제산 종택을 찾았을 때 만난 후손 분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그러면 제산이 누구인지, 왜 이곳으로 유배를 와 벗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버린 것인지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본관이 경북 의성인 제산의 할아버지는 생원 김방렬이고, 아버지는 김태중이었다. 제산은 어려서부터 문장에 뛰어났다고 한다. 17세에 갈암 이현일(1627~1704)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35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지평이 되었고, 이어서 사간원정언·홍문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737년 스승인 갈암을 신원해 달라는 소를 올렸다가 다행히 목숨을 건져 제주도 유배형을 받았다. 제주도에서 유명한 <반포조>라는 시를 지었다. 그 뒤 광양으로 이배되어 이곳 용선암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유배를 산지 11년 만에 별세하였다.
제산의 스승인 갈암은 퇴계학파의 적통인 외조부 장흥효와 중형 이휘일에게 수학하였으며, 1694년 4월 인현왕후가 복위된 갑술환국 때의 조사기를 신구(伸救·죄가 없음을 사실대로 밝혀 사람을 구원함)하다 함경도 홍원으로 유배되었다가 같은 함경도인 종성에 위리안치되었다. 1697년 광양으로 유배지가 바뀌었고, 1698년 갈은리(현 광양시 다압면 외압마을)로 이배되었다. 1699년에는 방귀전리(放歸田里·벼슬을 떼고 그의 시골로 내쫓는 형벌로 귀양보다 한 등급이 가벼움)의 명이 내렸다. 1700년 안동으로 돌아가 현 경북 안동시 임하면 금소리인 금양에서 세상을 떠났다.
C 박사님과 헤어져 마을로 내려오면서 제산의 사망 장소는 용소암이지만, 생활을 마을에서 했을 터이니 어느 집에 살았을까 궁금하였다. 아니면 세월이 많이 흘렀으므로 그가 살던 집이 사라졌을지도 몰랐다. 마을에 제산에 대한 표지판 하나 없는 게 안타까웠다. 요즘 세상에 누가 스승에 대해 목숨을 바쳐가면서 예를 다할까를 생각하니 가슴이 찡했다.
마을에서 내려 와 섬진강변 도로를 따라 외압마을에 들렀다. 섬진마을에서 외압마을까지는 버스로는 다음 정류장이었다. 외압마을은 갈암이 유배를 살았던 곳으로, 느랭이골로 가는 길목이다. 제산은 섬진촌으로 유배를 와 스승이 유배 살던 마을과 가깝다며 좋아했다고 한다. 마을 뒤로 올라갔다가 내려오다 보니 이원규 시인의 집 쪽으로 왔다. 혹시나 싶어 들어가니 그가 타고 다니는 오토바이가 있어 불러보았다. 인기척이 없어 전화를 하니 “집사람과 어디 좀 와 있다”라고 했다. 그와 통화를 한 후 신원리 쪽으로 가 섬진강 다리를 건너 악양 앞을 거쳐 필자의 집인 목압서사로 돌아왔다.
하지 못한 숙제를 쭉 안고 있는 듯하던 마음이 사라진 기분이었다. 시간이 날 때 제산의 종택이 있는 안동 천전리에 한 번 더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박사 massjo@hanmail.net>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