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지리산 산책 (50)목압서사에서 띄우는 편지(6)

산안개에 싸인 백운산을 바라보며

조해훈 승인 2020.06.20 18:12 | 최종 수정 2020.06.20 18:37 의견 0
장맛비가 내리는 날 광양 백운산이 실루엣처럼 보인다.
화개골에서 본 광양 백운산. 구름과 안개에 싸여 실루엣처럼 보인다.

제가 사는 지리산 화개골에서 남쪽인 화개장터 방향으로 보면 멀리 광양 백운산이 보입니다. 맑은 날씨에도 백운산 정상은 대부분 구름이나 산안개로 가려져 그 모습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답니다. 비가 내리는 오늘은 희뿜하게 실루엣처럼 보입니다. 산 정상은 좌우에 수많은 작은 산들을 거느리고 있는 형국입니다. 가까이 보이는 산은 봄을 지나 여름이 되니 거무스름하게 짙은 색을 드리우고 있답니다. 그렇지만 백운산을 바라보면 언제나 마음이 평온해짐을 느낍니다. 그래서인지 이 골짜기 사람들은 저 백운산이 보이는 자리에 앉은 터가 명당이라고 여기지요.

세월은 참 빨리도 지나가는군요. 그토록 바쁘던 봄이 어느 사이 지나가고 햇볕이 쨍쨍한 여름이 시작되더니 어느덧 장마철에 접어들었습니다. 해가 바뀐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해의 반이 지났군요. 찻잎을 더 이상 따지 않고, 고사리 꺾는 일도 이제 마무리하였습니다.

올해 접어들면서 필자는 바빠졌습니다. 차산의 억새와 쇤 고사리를 비롯하여 잡초 제거와 차나무 관리 등으로 특별한 일이 없으면 날마다 낫 한 자루 들고 산에 올라갔지요. 물론 중간에 교통사고로 병원에 잠시 입원한 것 외에는 찬 겨울바람 맞으며 산에서 살다시피 하였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고사리와 찻잎이 올라올 즈음에 날씨가 불순하여 영하로 내려가는 등 식물의 생장에 지장을 초래하였습니다. 제 차산은 마을 뒤 산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같은 화개면의 섬진강변에 있는 부춘마을이나 영당마을 등에 비하여 찻잎이 올라오는 시기가 통상 1주일가량 늦은 편이지요. 그쪽 마을에서는 3월 말부터 찻잎을 땄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제 차산은 4월 18일에 처음 억지로 한 움큼의 찻잎을 따 밤새 차를 만들어 다음날인 19일에 조상님들께 차를 올렸답니다. 곡우인 4월 20일을 지나 25일부터 소량이지만 제대로 채취하였습니다. 그런 상황에 기온이 내려가는 날이면 차나무가 싹틔우기를 멈추어 또 며칠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갈수록 차 소비가 늘어 올해는 차를 좀 넉넉하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만 혼자 찻잎을 따서 만드는 작업이 녹녹하지 않았지요. 지난해는 친구들이 와서 찻잎 따기와 덖어 비비고 만드는 일을 좀 거들어주었지만, 올해는 코로나19라는 상황 탓에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여하튼 올해는 지난해보다 녹차는 적게 만들었지만 발효차를 좀 더 많이 만들었지요. 찻잎을 채반에 담아 돌담 위에 올려 햇볕에 발효를 시켰습니다. 차에 대하여 잘 모르시는 분들은 잎이 큰 탓에 별로라고 생각하겠지만, 찻잎을 비벼보면 잎이 클수록 차의 액이 많이 나와 향이 더욱 진하지요. 그래서 발효차를 비빌 때면 차향이 온 집안에 진하게 풍겨난답니다. 게다가 잎이 큰 것은 며칠간이라도 햇볕을 더 쬐어 비타민 종류가 많다고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던데, 저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답니다.

요즘도 매일 차산에 올라가 뙤약볕 아래에서 일을 하다 보니 새까맣게 그을려 이 골짜기 원주민이 다 되었답니다. 제가 사는 목압마을에 이런저런 이유로 오시는 외지인들은 장화를 신은 채 작업복차림으로 낫을 들고 산에 가거나 내려오는 저를 만나면 불일폭포로 가는 길이나 어느 찻집의 차가 맛있는지 등에 대하여 묻습니다. 그럴 땐 저는 기분이 좋답니다. 제가 바라는 지리산 골짜기 사람이 다 되었다는 걸 인정받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지요.

-비빈 차를 집의 돌담 위에 얹어 햇볕에 발효시키고 있다.
비빈 차를 집의 돌담 위에 얹어 햇볕에 발효시키고 있다.

요즘에는 산에 올라가 쇠어버린 고사리를 잘라내고, 봄에 잘랐는데 옆으로 더 번져 올라온 억새를 자르기도 하고, 웃자란 차나무 가지를 쳐주는 등의 일을 합니다. 아침 일찍 산에 올라가 잡초 등을 베다가 햇살이 나기 시작하면 온 몸이 땀으로 젖는 것은 물론이고, 깔따구와 모기, 벌 등이 쏘아대어 모자를 썼다지만 온 얼굴과 머리가 불퉁불퉁해지지요. 산에서 이처럼 일을 하다 보니 글을 쓸 겨를이 많지 않아 글빚이 많아 밀려 있습니다. 진행하던 여러 작업도 중단되어 있지요. 농사일이란 때에 맞춰 해줘야만 한다는 걸 화개골에 들어와 4년 째 농사를 짓다보니 스스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참, 그리고 보름 전쯤에 암염소 두 마리가 저와 인연이 되어 여기서 가까운 피아골 중기마을에서 제 집으로 왔습니다. 차산 조금 아래에 별도로 있는 막사에 그것들을 묶어놓고 매일 아침에 차산에 올라가면서 풀을 베어 주었지요. 새끼를 밴 듯 배가 불룩한 염소를 ‘목자’, 날씬하지만 키가 좀 큰 염소를 ‘목순’이라고 이름 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저와의 인연이 그리 깊지 않은지 제가 베어다 주는 풀을 먹은 지 열 이틀째 되는 날 제 곁을 떠났습니다. 저는 환경이 바뀐 염소들이 안정이 되면 조만간 염소젖을 짤 생각을 갖고 있었답니다. 제가 중국의 서쪽 지역인 서안에서부터 실크로드의 도시들, 중앙아시아, 유럽 등에서 아침에 염소젖을 짜 페트병 같은 용기에 넣어 파는 아주머니들을 심심찮게 보아온 터였습니다. 그리고 여행 도중 유목민들과 간간이 지내면서 염소젖을 함께 짜본 경험도 있었답니다.

염소에게 풀을 베어 막사 바닥에 던져준 모습이다.
염소 '목자'와 '목순'에게 풀을 베어 막사 바닥에 던져준 모습.

다들 마찬가지로 생각하겠지만 사람이든, 짐승이든, 물건이든 인연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인연이란 좋은 인연도 있지만, 악연도 있을 수 있고, 평생을 함께 가는 긴 인연도 있고, 그렇지 못한 인연도 있더군요.

어제 저녁부터 내리는 비의 양이 제법 많은지 지리산 저 위쪽 영신사에서 발원되어 화개동천을 거쳐 섬진강으로 흘러내려가는 물소리가 제법 크게 들립니다. 장마철 비의 양이 엄청날 때는 계곡 물속의 큰 바위들이 천둥소리를 내며 구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답니다. 처음 그 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무섬증이 들기도 하지만, 저는 그 소리를 통하여 비로소 지리산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됩니다. 올해는 큰 비가 내리지 않고 적당한 양의 비가 내려 지리산의 모든 생명체에 자양분을 제공하고, 자연이 이치대로 운용해갈 수 있도록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박사 massj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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