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보는 사람이야기 (43)39세에 은거에 들어간 장원급제 엘리트 관료 김창협

조해훈 승인 2020.06.23 11:10 | 최종 수정 2020.06.23 11:41 의견 0
『농암집』(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농암집』의 판본은 대략 원집, 속집, 별집으로 구분되며, 원집은 다시 권1에서 권34까지 편차된 초간본과 여기에 권35와 권36을 덧보탠 보각본으로 나뉜다.
『농암집』(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농암집』의 판본은 대략 원집, 속집, 별집으로 구분되며, 원집은 다시 권1에서 권34까지 편차된 초간본과 여기에 권35와 권36을 덧보탠 보각본으로 나뉜다.

안동 김씨인 농암 김창협(1651~1708)은 당대에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주류에 속하였다. 20대에 이미 문장과 학문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32세에 문과 전시(殿試)에 장원급제하여 엘리트 관료생활을 시작하였다.

그의 증조부는 병자호란 때 척화파의 영수였던 좌의정 김상헌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김수항(1629~1689)이며, 영의정을 지낸 김창집이 형으로 대표적인 명문가 집안의 자제였다. 병조참지·예조참의·대사간 등을 역임하며, 우암 송시열(1607~1689)의 제자로 누구보다도 장래가 촉망되던 인물인 김창협이 39세에 돌연 모든 걸 버리고 은거에 들어가 평생 처사의 삶을 살았다.

이번 글에서는 김창협이 이른 나이에 출세가도를 포기하고 은거에 들어간 이유가 무엇이며, 이후 그의 삶은 어떠하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에 대하여 주목하는 이유는 단지 당대 최고 엘리트였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라, 주자학을 한 단계 더 심화시킨 대학자로 평가받는 인물이자, 숙종대 최고 문장가로 꼽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은거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면 어쩔 수 없이 또 당대의 정치상황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요직만을 거치던 김창협이 정치 현실로부터 등을 돌리게 된 이유는 스승 송시열과 아버지 김수항이 숙종에게 사약을 받아 죽었기 때문이다. 이때 그의 나이 39세였다. 예상치 못했던 엄청난 시련은 그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이에 그는 세상을 떠나 철저한 은거에 들어간 것이다.

부친 김수항은 스승 송시열과 노론계로 정치적 행보를 함께했다. 부친은 1672년(현종 13) 44세의 나이로 우의정에 발탁되고, 좌의정에 승진하였다. 그러나 2년 뒤인 1674년 갑인예송에서 서인이 패해 영의정이던 형 김수흥이 쫓겨나자, 두 번째로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숙종 즉위 후 남인이 집권하자 전남 영암에 유배되었다가 1678년(숙종 4) 강원도 철원으로 이배되었다.

1680년에 이른바 경신대출척이 일어나 남인들이 실각하자 영중추부사로 복귀해 영의정이 되어 이후 8년 동안 영의정으로 있다가 1687년 영돈녕부사로 체임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이 일어나 남인이 재집권하자, 그해 2월 진도로 유배되었다. 이어 윤3월 28일 사사(賜死)하라는 숙종의 명에 따라 4월 9일에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았다.

『주자대전차의문목』(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송시열의 『주자대전차의』에 대한 질문과 김창협 자신의 견해를 담은 이 책은 조선 주자학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는 명저로 평가되고 있다.
『주자대전차의문목』(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송시열의 『주자대전차의』에 대한 질문과 김창협 자신의 견해를 담은 이 책은 조선 주자학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는 명저로 평가되고 있다.

송시열은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송시열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 삭출되었다. 이듬해인 1675년(숙종 1) 정월 함경도 덕원으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경상도 포항인 장기와 거제 등지로 이배되었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유배에서 풀려나 중앙 정계에 복귀하였다. 1689년 1월 숙의 장씨(장희빈)가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자 원자(元子: 세자 예정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남인이 재집권했다. 송시열은 이 때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그 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부친 김수항이 사사된 한 달 뒤에 김창협의 다섯 형제들은 송시열에게 편지를 써 아버지의 묘지문을 부탁하였다. 주희가 아니었다면 굴원의 뜻이 다 밝혀지지 못했을 것이라며, 김수항의 뜻을 온전히 밝힐 수 있는 사람은 송시열뿐임을 강조하였다. 5월 8일에 김창협이 5,670자에 달하는 장문의 편지를 작성한 것이다. 당시 송시열은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다가 명을 받고 한양으로 압송되던 중이었다. 송시열은 전라도 장성에서 이 편지를 전해 받고 6월 3일에 바로 묘지문을 지었다. 그리고 닷새 뒤인 6월 8일에 송시열은 정읍에서 사약을 받았다. 따라서 송시열의 생전 마지막 유작은 김수항을 위한 묘지문이었던 것이다. 부친이 사사 당한 지 두 달 뒤에 스승마저 사사된 것이다.

불과 한 해 전에 스승인 송시열과 함께 『주자대전차의』를 교정하고 천안 병천 일대를 유람하던 김창협으로서는 이렇게까지 급변한 상황을 예상하지 못하였다. 이로써 불과 몇 달 사이에 광풍처럼 휘몰아친 정쟁의 와중에 김창협은 임금 숙종의 명으로 부친과 스승을 연달아 잃는 슬픔을 겪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에 있는 김창협의 묘.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에 있는 김창협의 묘.

김창협이 송시열에게 부친의 묘지문을 부탁하며 쓴 편지 「아버지의 묘표를 스승에게 부탁하다(上尤齋先生書)」의 앞부분만 잠시 보도록 하겠다.

“아버지를 여윈 창집 등은 피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조아려 재배하고 우암 선생께 편지를 올립니다. 저희가 지은 악행이 쌓여 천지신명께 죄를 얻어서 참혹한 화가 선친에게까지 미쳤습니다. 그런데도 저희들은 불효막심하게도 대궐 앞에서 북을 치며 임금님께 호소하여 억울함을 아뢰지도 못하였고 칼에 엎어져 자결해서 저승에 따라가지도 못했습니다.… 후략”(『농암집』 권12에 원문 수록, 송혁기 옮김 『농암집』 164쪽 인용.)

정쟁의 잘잘못에 대한 평가는 입장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정파를 떠나서 평상심을 잃지 않고 죽음을 맞이한 김수항, 그리고 자신 역시 죽음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먼저 간 동지의 묘지명을 써 주는 송시열의 모습에서 우리는 어떤 부류의 인간인지 생각하게 된다.

김창협에게 부친과 스승의 사사는 일체여야 마땅한 군사부(君師父)의 관계가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그가 39세 은거에 들어간 5년 후에 다시 정국이 바뀌어 그가 속한 정파와 가문이 다시 정권을 쥐게 되었지만, 그는 수십 차례의 계속된 관직 제수에 단 한 번도 응하지 않고 철저히 처사의 삶을 살아갔다. 이후 그의 삶을 채운 건 대부분 학문과 문학, 그리고 산수 유람이었다.

그리고 김창협은 불행한 가족사를 겪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정쟁으로 인해 아버지와 스승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겪었으며, 같은 해에 돌을 겨우 넘긴 둘째 아들 청상이 죽었다. 50세 되던 해에는 시집간 셋째 딸을 먼저 보냈고, 뒤이어 탁월한 시적 재능을 타고나서 시 벗처럼 지내던 맏아들 숭겸을 잃었다. 53세 되던 해에는 둘째 딸이 세상을 떠났으며, 같은 해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특히 맏아들이 죽은 뒤로 김창협은 더 이상 시를 짓지 않았고, 모친상을 치르면서 급격히 쇠약해져 결국 5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김창협의 저서로는 『농암집』과 『주자대전차의문목』 외에 『논어상설』·『오자수언』·『이가시선』 등이 있고, 편저로는 『강도충렬록』·『문곡연보』 등이 있다.

조해훈 시인

<참고자료>

-김창협, 『농암집(農巖集)』
-김창협 지음, 송혁기 옮김(2016), 『농암집』, 한국고전번역원.
-김창협 지음, 한국초서연구회 옮김(2015), 『농암진적-농암 김창협의 삶과 편지 그리고 사상』, 한국초서연구회 간찰자료집1, 민속원.
-이천승(2006), 『농암 김창협의 철학사상 연구』, 한국학술정보.
-차용주(2007), 『농암 김창협 연구』, 경인한국학연구총서 52, 경인문화사.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박사 massj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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