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2월에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이 ‘표암 강세황의 시·서·화·평’전을 열면서 『와유첩(臥遊帖』을 공개했다. 이것은 조선시대의 전문 여행가이자 산악인이었던 정란(鄭瀾·1725~1791)이 자신이 체험한 내용을 문인과 화가들에게 부탁해 받은 작품을 엮는 화첩이다.
4쪽으로 된 이 화첩은 강세황과 중인 출신의 화가 최북, 그리고 허필의 그림이 강세황의 것으로 추정되는 글씨와 함께 들어있다. 와유첩은 말 그대로 ‘놀러가서 그린 그림’이라는 뜻이다. 원래 강세황의 친구인 정란이 받아 보관했다가 강세황의 동료문인 신광수에게 건네져 그 후손들이 계속 수장해온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정란이 누구인지 잠시 살펴보자. 18세기 후반 창해일사(滄海逸士)란 호를 사용한 정란의 본관은 동래로, 서울 남산 아래 주자동에 살다 증조부 때부터 경상도 군위군 소보면 달산으로 이주함으로써 그곳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그는 창원부사를 지낸 정광보(1457~1524)의 10대 손으로 스무 살 무렵 문장가로 유명했던 청천 신유한(1681∼1752)을 찾아가 그의 문하에서 공부를 했다. 그러던 중 정란이 28세 때 스승 신유한이 세상을 떠났고, 그는 서른 즈음에 공부를 접고 여행길에 나섰다. 그의 여행은 당시 선비들에게 유행하던 현실도피적인 경향과는 달리 전문 여행가이자 산악인으로 나선 것이었다.
그러면 그가 왜 당시 선비들처럼 과거를 해 벼슬길에 나가는 걸 포기하고 여행가로의 삶을 선택하게 되었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정란이 세속적인 명예와 욕심을 원치 않은 성격인데다 평범하지 않은 기질 때문으로 분석된다. 그의 벗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경주 보문리에 살던 치암 남경희(1748~1812)가 정란에 대해 쓴 글(『치암집(痴庵集)』 권9, 「정창해전(鄭滄海傳)」)에서 그런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그중 일부만 보자.
“선생은 생김새가 깡마르고 기이하여 보통 사람과 달랐다. 성품은 뻣뻣하고 오만하였으며 … 예법에 구애되지 않았다. … 탄식하며, ‘대장부가 해동에 태어나 비록 사마천처럼 천하를 유람하지는 못할지라도, 해동의 명산대천을 두루 본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하다’라며, 나귀 한 마리를 장만하여 홀연히 혼자 길을 떠났다.”(先生狀貌, 枯奇異衆, 性亢傲, … 不規規於禮法, … 嘆曰, ‘大丈夫生於海東, 縱不能如司馬子長之爲, 觀盡海東名山大川, 足矣.’ 於是, 備一匹驢, 蕭然獨行.)”
벗인 남경희가 묘사하였듯이 정란은 세상의 욕심과는 거리가 먼 스타일이었으며, 규정된 틀에 박혀 살기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그런 결정을 하는 게 쉽지 않은데 교통수단도 발달하지 않는 18세기에 여행가의 삶을 살아가기로 마음먹는다는 게 일반인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 혜환 이용휴(1708~1782)가 <백두산을 등반하는 정란을 배웅하며>(『혜환시집(惠寰詩集)』) 제목으로 지은 연작시 중 제7수를 보자.
산에 오름은 공부하는 것과 같으니 登山如進學
큰 고생 뒤에는 큰 즐거움 얻는다. 大苦必大樂
하늘만을 오르지 못할 뿐 惟天下可升
천하 모든 땅을 내 발로 밟겠다. 餘皆得着脚
이익의 조카이자 남인 실학파의 중심이었던 이가환의 아버지인 이용휴가 백두산으로 떠나는 정란을 배웅하며 써준 연작시의 일부이다. 첫 행은 정란에게 있어 산을 오르는 일은 공부에 매진하는 것과 같다는 의미이며, 둘째 행에서는 백두산에 오른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될 만큼 위험한 행위이므로 산 위에 올랐을 때 그 기쁨은 힘든 만큼 크다고 이야기 한다. 셋째 행과 넷째 행에서는 이용휴가 정란에게 있어 하늘에 오르는 것 외에는 조선의 땅을 다 밟을 것임을 알고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이용휴의 표현대로 정란은 여행이 좋아서 조선천지를 발로 다 누볐던 것이다.
정란은 백두산·금강산·묘향산·지리산·덕유산·속리산·태백산·소백산 등 전국의 명산을 두루 등반했다. 백두산은 정상까지 올랐고, 금강산은 네 차례나 밟았다.
정란은 여러 사람에게 자신의 여행을 이야기 하며 글과 그림을 받았다. 그에게 글과 그림을 준 인사들로는 채제공·이용휴·강세황·최북·김홍도 등이다. 이들 덕에 정란의 존재는 후대에까지 기억되고 있다. 그렇지만 정작 그의 글은 전하는 것이 별로 없다. 『유산기(遊山記)』라는 여행기를 남겼다고 하지만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김홍도의 자택을 그린 <단원도(檀園圖)>에 적어 넣은 짧은 시 2편이 남아 있는데, 여행과는 관련이 없다. 그가 백두산에 올라지었다는 시의 일부가 이경유(1750~1821)의 『창해시안(滄海詩眼)』에 실려 전할 뿐이다. 창해시안에 실린 정란의 글을 한 번 보겠다.
땅은 곤륜산에서 형세가 일어났고 地自崑崙山起勢
물은 성수해에서 신령하게 통했으리 水應星宿海通靈
누가 천만 리 황무지를 개척하여 誰拓幽荒千萬里
세상에 나 같은 일개 서생을 용납했나 世間容我一書生
곤륜산은 백두산의 근원이며, 성수해는 황하의 근원이다. 곤륜산 지맥은 백두산까지 이어지고, 황하의 물줄기는 동해까지 흘러온다. 이처럼 넓디넓은 세상에 자신 같은 사람 하나쯤 있어도 상관없지 않은가라고 반문한다. 그건 넓은 세상을 구경하고, 많은 사람을 만나본 경험에서 나온 생각일 것이다.
정란은 1785년 명산 여행의 대미를 장식하는 차원에서 한라산 등반을 위해 제주로 향했다. 당시 제주도로 오가다 풍랑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그만큼 제주로 간다는 것은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게다가 정란의 나이는 이미 환갑을 넘겼다. 이경유와 그의 부친 이승연은 모두 글을 써 주며 정란을 격려했다. 이경유는 『창해시안』에 이렇게 기록했다.
“창해일사 정란은 사람됨이 기이하고 예스럽다. 노새 한 마리를 사서 이름난 산천을 유람하니 사람들이 모두 미친 사람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만은 기이한 선비로 인정했다.”
당시 사람들은 선비가 부지런히 과거공부를 하여 벼슬에 나아가 부모를 공양하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전국의 산을 쏘다니는 정란을 ‘미친 선비(狂士)’라고 불렀다. 급제해 하루빨리 관직에 오르는 것 인생의 목표였던 선비들의 눈에 다른 삶을 추구하는 정란이 곱게 보일 리 없었던 것이다.
<참고자료>
-안대회(2012), 『벽광나치오』, 휴머니스트
-이용휴 저, 조남권 역(2002), 『혜환 이용유 시전집』, 소명출판
-강민구(2008), 「『滄海詩眼』을 통해 본 18, 9세기의 문학 비평 연구」, 『漢文學報』 18, 우리한문학회
-장유승(2020), 「『滄海詩眼』 연구의 재검토」, 『漢文學報』 42, 우리한문학회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박사 massj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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