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1735~1762·장헌세자)가 1762년 한 여름인 윤5월 13일 뒤주 안에 갇혀 9일 만에 굶어 죽은(윤5월 21일) 사건은 지금도 그 잔혹성에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는 친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27세 때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1762년(영조 38) 임오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임오화변(壬午禍變)으로도 불린다.
이준익 감독이 2015년 9월 16일에 개봉하여 6백만 명 이상의 관객을 모았던 영화 <사도(思悼)>는 이 사건에 대해 사람들의 관심을 더욱 끌도록 만들었다.
당대에 사도세자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전말을 기록한 책이 있다. 박하원이 1800년(정조 24)경 쓴 『대천록(待闡錄)』이 그것이다. 이 책은 남인 계통의 시파(時派)인 박하원이 사도세자 사건과 이를 둘러싼 정치사정을 기록한 역사서이다. 하지만 이 책은 당시에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하고, 1934년 서울 박문서관에서 간행되었다. 책은 상편·중편·하편과 후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만조의 서문과 이원영의 발문이 있다.
그러면 대천록의 발간이 그토록 늦은 데는 어떤 연유가 있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박하원이 누구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만가보』(6책 47면 7단 5행)와 『반남 박씨 세보』(5단 2행)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박사운(朴師運)이며, 박하원의 아들은 박종식(朴宗植)으로 나와 있다. 박하원의 처는 동복 오씨(同福 吳氏)이고, 장인은 오대유(吳大有)이다.
또 『순조실록』 2권, 순조 1년(1801) 2월 23일 기사 중 1번 째 기사를 잠시 보자.
- 심환지가 말하기를,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심노숭을 절도정배(絶島定配)하소서.’ 하였고, 사간원에서 아뢰기를, ‘홍대협은 먼 지방에 내치고, 심기태·박하원은 도배(島配·섬으로 유배)하며, 이조원·홍지섭은 찬배하소서.’ 하니, 마땅히 대신에게 하문하여 처리하겠다고 하신 하교가 있었습니다.”라고, 박하원에 대한 기록이 있다.
박하원의 문집이 없어 정확한 생몰년은 나와 있지 않지만 순조실록을 볼 때도 문신이었던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박하원은 1792년(정조 16) 남인 계열의 시파로 소를 올릴 때 그 소장을 찬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는 사도세자를 동정하는 시파의 인물로 사도세자 사건에 얽힌 여러 가지 이면적인 문제를 철저히 정리하고 기록해 『천유록(闡幽錄)』이라 명명하여 정조에게 올렸다.
그러나 정조는 그 내용에 동감하면서도 당시 정치적 상황 등을 고려해 곧바로 세상에 내놓으면 여러 문제가 생길 것을 짐작하였다. 그래서 책명을 ‘대천록’이라 고치게 하여 박하원에게 다시 내려 보냈던 것이다. 이 책에는 정조 사망까지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박하원이 사망한 후 그의 후손들이 대천록의 내용을 계속 보강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그는 왜 대천록을 지었을까? 박하원은 시파와 벽파(僻派)의 갈등에 관한 것에 대해 시시비비를 명확하게 밝히고자 한 것이었다. 정치적 영향력이 컸던 노론의 벽파에 의해 사도세자 사건이 왜곡되거나 정치적 이념에 의해 사실과 다르게 후대에 전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현장에 있지는 않아 직접 보지는 못하였지만, 여러 사람들로부터 들은 내용과 문헌에 나타난 것을 바탕으로 기록하였다.
그 뒤 정조가 죽고 노론계통의 벽파가 다시 득세하였다. 그러자 벽파는 박하원이 이전에 남인으로 상소했던 일과 『천유록』을 지은 일 등을 이유로 삼아 유배를 보냈고, 그는 유배지에서 죽고 말았다. 나중에 그의 증손 박제대가 순조 즉위부터 1806년(순조 6) 이후 벽파가 몰락하는 과정을 후록으로 추가했으나 역시 간행하지 못하였다. 이후 1897년 사도세자가 장조(莊祖)로 추숭된 뒤, 박하원의 5대손인 박승집이 박문서관을 통하여 간행하였다. 그러니까 이 책은 몇 대에 걸쳐 후손들이 계속 기록을 이어 나가 완성한 것이다.
책의 본문은 영조 즉위 이후 노론계통인 벽파의 득세와 벽파의 사도세자 공격, 시파의 사도세자 옹호와 사도세자의 죽음, 정조 즉위 후 시파의 벽파 공격과 사도세자 묘의 수원 이장 경위, 이후 시·벽파의 대립과 정조의 죽음까지의 정치적 사실을 시파의 입장에서 정리되어 있다.
한편 2015년 11월에 수원화성박물관에서 박종겸(1744∼1799)이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한 내용을 기술한 또 다른 책인 『현고기』를 번역 출간한 바 있다. 현고기는 사도세자에게 우호적이었던 소론 측에서 사건의 전말을 기록한 책이다.
사도세자의 죽음관 관련한 야사는 이 외에도 노론계에 속하는 서준보의 『시벽원위(時僻源委)』, 현장에서 기록을 담당한 승정원 주서이자 역시 남인계에 속하는 이광현의 『임오일기(壬午日記)』 등이 있다.
정조의 정책에 반대했던 벽파에는 대체로 노론의 다수가 참여했고, 반면 정조 지지 입장을 가진 시파에는 노론의 일부 및 소론과 남인세력 등이 참여했다. 조선왕조의 당쟁사는 수백 년간 이어졌는데, 사도세자 문제를 두고 나뉜 시파와 벽파의 대립은 다른 당파싸움과 마찬가지로 이후 조선왕조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박사 massj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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