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6년에 일어난 병자호란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인조가 남한산성의 성문을 열고 삼전도로 가서 청나라 태종 앞에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행한 후 치욕적인 맹약을 맺고 신하가 된 사실이다. 삼배구고두란 알다시피 세 번 절을 하면서 한 번 절을 할 때마다 땅바닥에 세 차례 머리를 내려 찧는 굴욕적인 예이다. 땅바닥에 머리를 아홉 번 찧은 인조는 이마에서 피가 철철 흘렀다.
인조의 이 굴욕적인 맹약 외에 많은 독자들은 막말로 “죽더라도 싸워 청나라가 함부로 조선을 대하게 하지 말자”라는 척화파 청음 김상헌(1570~1652)과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해주어야 모두가 산다”라며 화친론을 주장한 지천 최명길(1586~1647)이 생각날 것이다.
대개의 사람들이 남한산성에서의 스토리는 알고 있으므로, 이번 글에서는 “끝까지 싸우자”라며, 목숨을 내놓고 주장을 굽히지 않다 중국 심양으로 압송되어 6년간 감옥살이를 한 김상헌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인조는 청나라 군대에 의해 남한산성이 포위된 상황에서 항복하라는 국서를 받고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김상헌은 인조에게 “고금 천하에 망하지 않는 나라는 없습니다. 군신이 굳게 지켜 뜻을 확고히 한다면 비록 망하더라도 무엇이 부끄럽겠습니까?”라며, “지금 사졸들을 격려하여 죽을 각오로 싸운다면, 하늘이 보우하고 역대 왕들께서 돌봐 주실 것입니다”라고 화친은 결단코 해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화친으로 결론이 나 화친론의 선봉에 섰던 최명길이 답서를 짓게 되었다. 최명길의 답서를 읽어보던 김상헌은 반도 채 읽기 전에 격분을 이기지 못하여 통곡하면서 국서를 찢어버리고는 최명길을 나무랐다. 최명길은 “대감의 말씀이 옳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는 부득이한 상황에서 나온 것입니다. 대감이 찢었으니 저는 줍겠습니다. 나라에는 마땅히 항복하는 국서를 찢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또한 이를 주워 수습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김상헌은 “오늘의 이 일은 공이 책임져야만 할 것입니다”라며, 분기를 가슴에 가득 띤 채 말하였다.
말을 마친 김상헌은 곧바로 인조에게 면대를 요청하였다. 인조는 “화친하는 것이 어찌 내 일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겠는가. 경의 논의는 정정당당하니 훌륭한 말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옛사람들도 어찌 생각 없이 이러한 일을 하였겠는가”라며, 김상헌의 주장도 일리가 있고 맞는 말이라고 해명하였다.
김상헌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조는 곧바로 청나라에 답서를 보냈다. 청나라는 화친에 앞서 그동안 척화를 주장하였던 사람 두 세 명을 잡아서 보내라고 요구하였다. 김상헌은 자언하였지만 조정에서는 그가 나이가 너무 들어서 보낼 수가 없다고 하면서, 윤집과 오달제를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1637년 1월 30일에 인조는 청 태종 앞에서 신하의 맹약을 하였다.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자 김상헌은 고향인 경북 안동 풍산의 학가산 아래에서 살아갔다. 어느 날 그는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하여 조선에 출병을 요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반대하는 소를 올렸는데, 이를 알게 된 청나라가 그를 잡아 의주로 보내 청나라 장수의 심문을 받게 하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김상헌은 의주로 가 청나라 장수 용골대의 심문을 받았다. 하지만 김상헌의 뜻을 꺾을 수 없었던 용골대는 김상헌을 심양으로 끌고 가 북관에 수감하였다.
1644년 4월에 명나라가 망하였다.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긴 청나라 조정에서는 더는 조선의 왕자인 소현세자를 비롯한 대군들 및 김상헌이나 최명길 등의 대신들을 볼모로 잡아둘 필요가 없어 모두 돌려보냈다. 김상헌은 소현세자 등과 함께 이듬해인 1645년 2월에 귀국하였다. 김상헌은 처음 끌려간 때로부터 6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와게 된 것이다. 이때 그의 나이 76세였다. 한편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는 1637년 2월 세자빈과 함께 인질이 되어 심양으로 끌려가 억류되어 9년 만에 김상헌 등과 풀려났다.
최명길은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항복한 이후 우의정과 좌의정, 영의정을 거치면서 대청 외교와 대명 외교의 복잡한 문제에 대처하면서 여러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는 와중에 최명길은 명나라와 내통한 사실이 있다고 하여 심양으로 끌려가 북관에 구금되었다. 김상헌 역시 얼마 뒤에 의주에서 다시 심양으로 끌려가 북관에 구금되었다.
한데 재미있는 것은 북관에서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함께 갇혀 있던 두 사람은 시를 지어 주고받았다. 그러는 사이에 두 사람은 서로를 점차 이해하게 되어 지난날의 반목과 질시에서 벗어났던 것이다. 오랜 세월 대립하였던 김상헌과 최명길의 화해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보기 드문 일이었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시들은 김상헌의 『청음집(淸陰集)』 40권 14책에 고스란히 전한다.
김상헌이 죽은 뒤 그의 정신은 송시열을 비롯한 반청파에게 계승되어 효종조에 북벌 정책을 추진하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효종이 승하하고 북벌 정책이 좌절된 뒤에도 이 정신은 조선 사대부들의 가슴 속에 지조와 절개의 상징이 되었다.
<참고자료>
-김상헌지음·장선용옮김(2016), 『청음집』, 한국고전번역원.
-지두환(2016), 『청음 김상헌』, 역사문화.
-김기림(2015), 「청음 김상헌의 시에 나타난 심양 체험과 그 인식 : 『설교집』을 중심으로」, 『이화어문논집』 37. 이화어문학회.
-김하윤(2013), 「청음 김상헌의 한시 연구」,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
-박수밀(2019), 「병자호란의 상흔과 청음 김상헌의 심양 억류 체험 고찰」, 『한국문학과 예술』 31, 숭실대학교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박사 massjo@hanmail.net>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