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보는 사람이야기 (39)최초로 지리산 유람기를 쓴 청파 이륙(李陸)

조해훈 승인 2020.05.15 19:19 | 최종 수정 2020.05.16 21:07 의견 0
기사의 첫째 사진의 지리산 전경 사진을 전송하는 천왕사 성모석상으로이륙이 천왕봉에 올랐을 때는 나무로 된 사당인 성모사(聖母祠)에 이 성모석상이 안치돼 있었다. 이 석상은 일제시대까지 천왕봉 성모사에  모셔져 있었는데, 지금은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천왕사(天王寺)에 봉안돼 있다.
지리산 천왕사 성모석상. 이륙이 천왕봉에 올랐을 때는 나무로 된 사당인 성모사(聖母祠)에 이 성모석상이 안치돼 있었다. 이 석상은 일제시대까지 천왕봉 성모사에 모셔져 있었는데, 지금은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천왕사(天王寺)에 봉안돼 있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600년 전인 1463년에 동행인 없이 지리산을 유람한 선비가 있었다. 그 선비는 청파(靑坡) 이륙(1438~1498)이라는 사람이다. 물론 그전에도 지리산을 유람한 사람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은 되지만, 남아있는 기록이 없다. 22살에 진사에 합격했던 그는 26세 때 지리산을 유람한 후 「지리산기」와 「유지리산록」을 남겼다. 유람기는 그의 문집인 『청파집(靑坡集)』에 실려 있다.

지리산 천왕봉(1,915m)에 가장 빨리 올라갈 수 있는 길이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에서 오르는 것이다. 이륙의 「지리산기」를 보면 “보암사(중산리 인근)에서 잰걸음으로 곧바로 오르면 하루 반 만에 천왕봉에 오를 수 있다. 그러나 돌비탈이 험준하여 지름길을 찾을 수 없다. 또 나무가 하늘을 가리고, 그 밑에는 가는 산죽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 호사가들이 종종 돌덩어리를 주워 바위 위에 올려놓아 길을 표시한다”고 적혀있다.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이 나무와 산죽 등으로 가려 길을 제대로 찾을 수 없는데, 호사가들이 길을 잘 찾을 수 있도록 돌로 표시를 해놓았다는 것이다. 이를 미루어 짐작할 때 이륙 이전에 중산리에서 천왕봉에 올랐던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륙이 천왕봉에서 1박을 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성모사(聖母祠)에서 잤을 것으로 짐작된다. 왜냐하면 지금은 천왕봉 인근에 장터목대피소가 있어 예약을 하고 잠을 잘 수 있지만, 600년 전에는 숙박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을 것이다. 당시 천왕봉 서남쪽 조금 아래 공터가 있었는데, 그곳에 나무집(판옥·板屋)이 있었다. 이 판옥이 성모사였는데, 성모석상(聖母石像)이 안치되어 있었다. 이 석상을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하지만 이륙이 갔을 때는 “사당에 천왕성모의 석상이 있는데, 정수리에 칼자국이 완연하다. 세상 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왜구들이 궁지에 몰리자 천왕성모가 자기들을 돕지 않는다고 여겨 그 분함을 참지 못하고서 정수리에 칼질을 하였다’고 한다.”(「유지리산록」)

필자가 쌍계사와 불일폭포, 국사암 등을 찾은 것은 고3 때이나, 천왕봉에 오른 것은 대학 1학년 때 벗들과 함께였다. 함양 백무동에서 올라가 가져간 텐트로 장터목대피소 인근에서 하룻밤을 잔 후 천왕봉을 보고 중산리로 내려왔다. 당시 등산화가 없어 운동화를 신은 데다 버스 시간 맞춘다고 중산리 급경사를 뛰다시피 내려오다 보니 오른쪽 발의 엄지발톱이 멍이 들고 아프더니 결국 빠져버린 기억이 있다.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이 2008년에 ‘고문헌총서5’로 출간한 『청파집』. 계명대는 초간본인 임신본(1512년)과 계축본(1853년)을 소장하고 있다(왼쪽). 이륙의 문집인 『청파집』 본문. 청파집은 1512년에 초간 됐고, 이후 1600년 초에 목활자로 재 간행됐으며, 1853년에 초간본을 보완해 다시 목판본으로 나왔다.

“불일암은 서쪽으로 쌍계사와의 거리가 10여 리이다. 골짜기의 절벽이 매우 높아서, 해와 달이 비추질 못한다. 또한 경유할 만한 다른 지름길이 없어서 절벽의 허리를 뚫고 올라야 한다. 위아래의 높이가 모두 몇 백 길이나 되는데, 한 사람이 겨우 다닐 만한 길이 나 있다. 절벽을 뚫고 오를 수 없는 곳에는 나무를 걸쳐 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이 길을 오가는 사람치고 놀라 식은땀을 흘리고 머리끝이 쭈뼛쭈뼛 서지 않는 이가 없다.”(「유지리산록」)

위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을 보면 역시 이 당시에도 불일폭포와 그 위쪽에 있는 암자인 불일암을 오가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필자가 고3 때인 1978년에 돌아가신 선친을 따라 불일폭포를 찾았을 적에도 이륙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이었다. 지금이야 지리산국립공원공단에서 나무계단과 철제 손잡이 등을 설치하고, 잔도를 정리해놓아 위험성이 훨씬 덜 하다.

여하튼 이륙이 우리 선인들 가운데 지리산을 유람하고 처음으로 유람록을 남긴 인물이다. 그의 「지리산기」가 지리산의 사찰·식생(植生)·기후 등을 기록한 인문지리에 관한 글이라면, 「유지리산록」은 그가 지리산을 유람하고 쓴 유람록이다.

그의 문집인 『청파집』은 1512년(중종 7)에 발간된 임신본(壬申本·계명대도서관 소장)과 광해연간에 발간된 광해조본(光海朝本·서울대 규장각 소장), 그리고 1853년(철종 4)에 발간된 계축본(癸丑本·계명대 도서관 소장)이 있다. 모두 2권 1책이다.

그러면 이륙은 대체 어떤 인물이며, 600년 전에 어떠한 연유로 지금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 지리산을 유람하였을까?

고성 이씨인 그는 1438년(세종 20) 4월 16일 서울 청파동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좌의정을 지낸 이원(李原)이며, 부친은 사간원 사간을 지낸 이지(李墀)다.

이륙은 22세 때인 1459년(세조 5)에 생원·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다. 3년 뒤인 25세(1462년) 때 영남지방을 유람한 후 지리산 단속사로 들어가 경전과 역사서 및 제자백가의 글을 섭렵하고 3년을 지냈다. 그는 단속사에 들어간 1년 뒤인 1463년 8월에 지리산을 유람하였다. 단속사는 경남 산청군 단성면 운리에 있는 사찰로, 통일신라의 제35대 경덕왕 당시 창건했다. 지금은 건물은 없고 동삼층석탑과 서삼층석탐만 남아있다.

그의 「유지리산록」에 따르면 “나는 천순(天順·명나라 영종의 연호로 1457~1464년) 말에 남쪽으로 영남을 유람하다가, 단속사에서 독서하며 1년 동안 머물렀다. 그 해 가을 8월에 단속사에서 서쪽으로 길을 떠나 … 천왕봉에 올랐고, 영신사·향적사 등 여러 절을 두루 돌아보았다. … 모두 2백여 리를 두루 돌아다녔다. … 유람을 떠나기 전날 저녁에, 절에서 길 안내할 사람을 구하기 위해 의논하였다. 그 당시 절에 사는 승려가 무려 1백여 명이나 되었는데, 어느 한 사람도 이 산을 유람한 자가 없었다. … 가을 8월 그믐 닷새 전날 유람을 마쳤다.”라고 했다.

이를 보면 그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진사시험에 합격한 후 더 넓은 세상을 구경하기 위해 영남지방까지 유람한 후 공부를 할 목적으로 단속사에 들어간 것으로 풀이된다. 이 절에 지내다 지리산과 천왕봉에 대한 이야기를 듣곤 사내라면 천왕봉을 거쳐 지리산을 유람해야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청파집』을 간행하기 위한 목판으로, 1853년에 제작된 것이다. 국립진주박물관 소장.

이륙은 8월(출발 일자는 정확이 알 수 없음) 어느 날에 단속사를 출발해 중산리에서 법계사를 거쳐 천왕봉에 올랐다. 그리고 영신사로 내려가 경남 하동군 화개면의 화개동에 있던 신흥사와 쌍계사를 거쳐 25일 단속사로 돌아왔다. 그는 동행 없이 7박 8일간 지리산을 유람한 것이다.

이륙의 지리산 유람 일정을 좀 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날에 단속사를 출발하여 살천현(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쪽에 있었던 진주목의 속현)→ 중산리 → 법계사 → 천왕봉에 올라 여기서 1박을 했다. 이튿날에 천왕봉에서 출발해 향적사를 거쳐 영신사에 도착했으며, 이곳에서 1박을 했다. 사흘째에 영신사를 출발하여 화개동 의신마을의 의신사를 거쳐 신흥마을의 신흥사(현 화개초등학교 왕성분교)에 도착해 1박을 했다.

그리고 그는 “반야봉으로 향하려다, 마침 식량이 떨어져 가지 못했다.”(「유지리산록」)고 한 것으로 봐 식량의 여분이 있었다면 그의 유람지역은 더 넓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당시 동행인도 없이 방장한 혈기만으로 천왕봉을 오르고 지리산을 유람했다는 것은 지금도 그렇지만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27세 되던 해인 1464년(세조 10) 세조가 충청도 온양에 행차해 실시한 시험인 춘방 문과에서 장원급제해 곧바로 성균관 직강에 임명되었다. 1466년 다시 발영시에서 2등으로 급제했고, 1468년 문과 중시에 을과로 합격했다. 이후 그는 사헌부 장령·성균관 대사성·예조 참판 등을 두루 역임했다. 53세 때인 1490년 정조사(正朝使·조선 시대에 해마다 정월 초하룻날 새해를 축하하러 중국으로 가던 사신)의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494년 성종이 승하하자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 『성종실록』을 편찬하는데 참여하기도 하였다. 경상도관찰사와 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후 병조참판(종2품으로 오늘날의 국방차관에 해당)으로 재직하다가 1498년(연산군 4) 3월 17일 61세에 생을 마감했다. ‘그가 좀 더 살았더라면 판서는 물론이고, 정승까지 했지 않았을까’라는 상상을 해본다. 600년 전에 목숨을 내놓고 지리산을 유람했으니 대담했을 것이고, 생각이 넓었을 것이니, 그 정도는 당연하지 않았을까?

조해훈 박사

<참고자료>

- 『세조실록』·『예종실록』·『성종실록』·『연산군일기』
- 『해동명신록』
-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2008), 『청파집』(고문헌총서5).
- 최석기 외 옮김(2000),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 돌베개.
- 최석기 외 옮김(2008), 『지리산 유람록-용이 머리를 숙인 듯, 꼬리를 치켜든 듯』, 보고사.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박사 massj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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