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지리산 산책 (44)화개동 산골에서 듣는 봄의 언어들

조해훈 승인 2020.04.01 23:13 | 최종 수정 2020.04.02 10:49 의견 0
만개한 화개 십리벚꽃
만개한 화개 십리벚꽃 [사진=조해훈]

석가모니의 언행록 또는 소승불교의 경전이라는 「아함경」에 맹귀치부목(盲龜値浮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맹귀우목(盲龜遇木)’으로 쓰지요. 바다 속에 사는 눈 먼 거북이가 백 년에 한 번씩 물 위로 올라와 숨을 쉬는데, 이 때 거북이의 목이 바다위에 떠다니는 구멍 뚫린 나뭇조각에 목이 낄 확률을 말한다고 하더군요. 불가에서는 이를 비유하여 그만큼 사람 몸 받기가 어렵다는 말로 해석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개는 몇 겁이 지나야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도 하지요. 하지만 인간으로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몇 겁이 지나도 삼악도(지옥·아귀·축생)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인간이 될 수 없다고도 합니다. 그만큼 착하게, 선행을 많이 베풀며 살아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겠지요.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요즘 필자는 사람으로 태어나 산다는 게 얼마나 행복하고 축복받은 일인가 하는 걸 절실하게 느끼기 때문입니다.

필자는 지리산 화개동(花開洞) 목압마을에서 복거(卜居)하듯 살고 있지요. 틈만 나면 낫 한 자루를 들고 차산에 올라가 농사를 지으며 화개동천과 골짜기를 조망하며, 여러 생각을 합니다. 고사리가 몇 개씩 올라오기 시작하는 어제도 산에서 혼자 종일 지냈지요. 지금 세상은 마치 온몸이 달아오른 듯합니다. 그리하여 식물마다, 나무마다 그들만의 언어를 쏟아내고 있지요. 필자는 마치 뜰채로 그러한 언어, 즉 이 봄에만 들을 수 있는 언어들을 건져 올리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그들이 경주라도 하는 것처럼 숨 가쁘게 피어나면서 쏟아내는 꽃의 소리들이랍니다.

날씨가 너무나 화창하여 만개한 화개 십리벚꽃이 눈부시다 못해 아프고 상처받았던 제 영혼까지 치유를 해주는 것 같습니다. 필자가 꽃의 언어들을 알아듣는 건 시를 쓰는 시인이기 때문은 아닌가 여기고 있답니다. 감히 비유할 바는 아니지만 불자들이 부처님의 소리를,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소리를 알아듣는 현상(?)과 비슷하다고 하면 몰매를 맞겠지요. 여하간 필자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선비들이 청학동으로 인식하였던 불일폭포 초입인 목압마을에 살면서 그러한 춘음(春音)을 듣는 능력으로 누구보다도 섬세한 행복감을 느낍니다.

할미꽃
할미꽃[사진=조해훈]

필자에게 어제까지 봄의 언어를 들려준 꽃들을 소개하자면 다 셀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개나리꽃·진달래꽃·명자꽃·동백꽃·청매화·홍매화·흑매화·이팝나무꽃·수선화·금낭화·별꽃·산수유꽃·머위꽃·복수초꽃·유채꽃·백목련화·자목련화·민들레꽃·패랭이꽃·족도리풀꽃·딸기꽃·철쭉꽃 등 너무나 많지요.

오늘은 집에서 쌍계초등학교와 쌍계사매표소를 거쳐 가탄리 백혜마을 올라가는 입구에 있는 카페루나까지 1시간 반 동안 걸어오면서 역시 너무나 다양한 꽃들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교통사고로 몸이 좋지 않아 평소보다 30분가량 더 소요되지만 전혀 지겹지 않았지요. 꽃들은 아무리 귀를 막아도 서로 필자의 귀에 들이밀듯이 노래하였습니다. 그것은 필자만이 알아듣는 언어들이지요. 그건 아마도 예민한 시인의 감각 덕분일 겁니다.

4월 첫날인 오늘 화개 벚꽃이 바로 내려다 보이는 카페루나에 와서는 또 다른 꽃들의 언어를 듣고 있습니다. 개나리자스민꽃·사계국화·동전초꽃·꽃잔디화·마거리트꽃·꽃사과화·이베리스꽃·남경화·할미꽃·카네이션꽃·만데빌라꽃·금잔화·메발톱꽃 등으로부터 꽃들이 존재하는 이유까지 들었지요.

남경화
남경화[사진=조해훈]

음력 4월 24일이면 올해 양력으로 5월 16일입니다. 필자의 60갑자가 돌아오는 날인 환갑이지요. 그런데 신기한 것은 도시에 살 때보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꽃들의 언어를 더 많이, 더 깊에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겁니다. 아마도 하루 하루 삶의 짐을 버리다보니 필자의 마음 속 공간이 그만큼 더 넓어지는 것은 아닌지도 모르겠군요.

아, 마침 희고 분홍색의 꽃잔디 사이로 카페루나의 두 내외분이 키우시는 고양이 ‘이수’와 ‘오수’가 앉아 재롱을 피웁니다. 그들도 필자처럼 맑은 햇살 아래서 봄의 언어들을 듣는 것은 아니겠지요. 필자는 그 풍경과 꽃들의 언어가 어우러지는 걸 듣습니다. 고양이들의 사진을 한 장 찍고 싶어 다가가니 옆으로 몸을 피합니다. 사람과 다른 미물의 본능이자 정직한 반응이겠지요.

미물과 달리 사람이기에 슬픔과 고통을 진하게 느낍니다. 꽃이 지고나더라도 그들의 언어를 가슴에 품고 살 수 있지요. 필자가 다음 생에서 이 낙원에서 추방을 당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원죄의식을 지닌다고 하지만, 근래 들어 자주 살아온 지난 60년간의 시간을 되돌아본답니다. 살면서 무의식적으로 또는 잠시 방심하는 사이에 실수로 지은 죄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1987년에 등단하였으니 시인으로 산지도 30년이 넘었지요. 시인으로서 늘 유한한 인간의 세계를 경험하면서 무한한 세상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일반인들보다 자의적이든 아니든 간에 오감이 더 확장된 것인지도 모르지요.

꽃잔디화[사진=조해훈]

시인에게 세상의 모든 질료는 현실적이든 추상적이든 시적 대상입니다. 봄이면 꽃들로부터 듣는 일상을 초월한 소리는 미학적 언어이자 예술적 언어이기도 하지요. 하나의 풍경을 얻으려면 시인의 캔버스는 비워두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빈 공간이 있어야만 소리를 그 속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사람으로서도 변변찮고, 시인으로서도 몇백 년간 살아남을 시 한 편 쓰지 못하는 주제입니다. 하지만 마신 빈 커피잔을 놓고 카페루나에 앉아 흐릿한 광양 백운산을 마주하며 벚꽃 사이로 몸을 틀며 희번덕이는 화개동천을 음미하는 지금이 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일 겁니다. 필자의 짧은 어휘로는 뭐라 다 표현할 수 없지만 서경과 서정이 서로 공감하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지요.

글머리에서 지적한 ‘맹귀우목’처럼 다음 생에서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기에는 이 생의 업보가 너무 많습니다. 그리하여 가능하면 지금의 생에서 비록 회한의 정조가 아니더라도, 시인으로서의 모든 감각을 열어 풍경을 받아들이고 봄꽃들의 언어들을 다 알아듣는 것이랍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박사 massj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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