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지리산 산책 (36)설 대목 구례장을 가다

상인과 손님의 애교스런 다툼(?)에서 활력과 '내가 살아 있음'을 느낀다
귀가길 내내 나를 따라오는 듯한 섬진강의 푸른 물살을 보았다

조해훈 승인 2020.01.19 12:22 | 최종 수정 2020.01.20 13:42 의견 0
설 대목 구례장에서 점심을 먹는 상인 부부. 사진=조해훈

요즘 당뇨 수치가 너무 높게 올라가 약을 아무리 먹어도 조절이 되지 않아서인지 피곤하여 일상생활을 겨우 겨우 해 나간다. 성격 탓으로 남들이 받지 않을 스트레스를 많이 불러들였다. 마침 오늘이 구례장이어서 점심을 먹은 후 장으로 향하였다. 설날이 코앞이라 사람들이 북적이는 장터에 섞이면 필자를 짓누르는 스트레스도, 여러 고민들도 덜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예상했던 대로 명절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로 그 큰 구례장이 붐볐다.

필자를 포함하여 5일장이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이던가. 원천적으로는 개개인이 생산한 농산물이나 수산물, 공예품 등을 서로 사고파는 매개로서의 역할을 하는 공간이다. 어떤 이는 “장에 가면 사람들의 활기를 느낄 수 있어 일이 없어도 장 구경을 간다”고 했다.

그렇다. 필자에게도 장은 그런 의미이다. 세상이 어둡게 생각되거나 무언가에 짓눌린 것처럼 초췌함을 느낄 때 장에 가서 하나라도 더 팔려고 애를 쓰는 상인들과 한 푼이라도 더 싼 가격에 사려는 손님들의 애교스런 다툼(?)을 보면 그야말로 “내가 살아있구나!”라는 생명감을 느낀다.

우리의 삶이 무어 그리 거창하던가. 우리의 일상은 작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도로가에 먼지 덮어쓴 채 소리 없이 피어 있는 자그마한 들풀의 모습이거나, 꽃이 다 지고 사람들의 발길에 밟혀 형편없이 엎드려 있는 풀잎의 잎사귀일지도 모른다.

장터 들어가기 전에 붕어빵을 파는 리어카에서 세 개에 1천 원인 빵을 한참 기다렸다 산 후 먹으면서 걸었다. 날씨가 흐리고 추었다, 햇빛이 났다 반복되었다. 생선가게가 쭉 늘어선 곳에는 상인들이 생선을 칼로 탁! 탁! 내리쳐 자르거나 내장을 빼고 있었다. “저분들에게 오늘만 같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평소에 장사가 안 되어 파리를 날리는 모습은 보이지 않을 텐데 말이다. 조금 더 들어가니 흑산도 홍어가 이름표를 옆에 둔 채 누워 있었다. 주인 할머니가 바쁘시어 가격을 물어보지도 못한 채 지나쳤다. 어차피 구입할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래도 귀하다고 하는 홍어 가격이 궁금했다.

꼬막가게

육류가게 옆 틈새 자리에 장날 가면 늘 보는 아주머니가 역시 도토리묵을 팔고 계셨다. 아주머니가 마음씨도 좋아 보이고 친절하시어 필자도 그 분께 도토리묵을 사 먹은 적이 있다. 앞을 지나니 아주머니께서 아는 체를 하시어 “많이 팔리십니까?”라는 인사를 건넸다.

거기서 왼쪽으로 꺾어 가니 아저씨가 큰 목소리로 조개류를 팔고 있었다. 한 아주머니가 사려고 하다가 “다음에 오겠다”며 돌아서자, 아저씨는 들으라는 듯 뒷말을 했다. 마른번개가 소심한 필자의 가슴을 치고 가는 듯 했다. 그 맞은쪽에 부부가 족발을 팔고 계셨다. 아저씨와 아주머니 두 분 모두 사람들이 좋아보였다. 웃는 얼굴이었다. 잠시 구경하다 작은 것을 달라고 했다. 비닐 팩으로 감싼 뒤 까만 비닐봉투에 담아주셨다.

조금 더 들어가면 장에 나올 때마다 인사를 나누는 과일을 파는 아저씨가 계신다. 순천에서 과일을 경매 받아 순천시장과 구례시장에 나와 판매를 하는 분이다. 아저씨 쪽을 바라보니 바쁘신 것 같아 돌아섰다. 장에 나온 사람들이 더 늘어난 것 같았다. 모든 사람들이 차례를 지내는 것은 아닐 터이다. 필자처럼 지치고 병든 몸에 생동감을 불어넣기 위해 나온 사람들도 저 속에는 있을 것이다. 필자처럼 집을 벗어나 장터로 나와야 삶의 의지를 다지고 몸의 기력이 회복되는 이들이 왜 없겠는가.

장에 나온 사람들의 옷은 필자처럼 대부분 검었다. 평소에 나보란 듯 가진 게 별로 없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들의 모습에서 숨죽이고 열심히 살아가는 세월이 언뜻 언뜻 비쳤다. 장삼이사 우리의 인생이란 부표도 없이 흔들리며 살지 않는가. 살다보면 확실한 건 없고 모든 것이 쉼 없이 흐르는 물과 같다. 물살이 좋은 곳에서는 마음을 굳게 먹고 멈추려고 해도 떠밀리다 보니 뒤돌아볼 새도 없이 세월만 지나가는 것이다.

더 앞으로 걸어가니 큰 파라솔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 있다. 무슨 구경거리라도 있는 것인가. 마치 월척을 생각하며 바삐 달려가는 어설픈 낚시꾼의 마음으로 걸어갔다. 이럴 때의 마음은 지나간 시간은 말할 것도 없고, 아픈 몸 상태도 잠시 잊는다. 아무 것도 모른 채 뛰어다니는 열 오른 아이의 얼굴이 된다.

호떡 파는 아가씨

사람들이 빙 에워싼 곳에 가 고개를 쑥 내밀어서 보니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아리따운 젊은 여성이 호떡을 구워 팔고 있었다. 호떡이 컸다. 얼마냐고 물으니 여성은 말이 없고 서서 기다리는 손님이 “한 개에 천 원 입니다”라며 대답했다. 붕어빵 세 개를 먹었지만 호떡을 사 가는 사람들마다 맛있다고 하니 하나 먹고 싶어 서 있었다. “줄이 없으니 깡통에 돈 넣은 순서로 호떡 가져가면 됩니다”라고 한 손님이 말을 해 필자는 천 원짜리 한 장을 넣었다. 필자의 차례가 되어 종이컵에 호떡을 담아 무리에서 빠져나왔다. 아이처럼 호떡을 먹으며 구례장에 오면 늘 들리는 찻집인 ‘꽃길’로 방향을 잡았다. 꽃길에 들어가기 전에 꼬막을 파는 아저씨가 있어 한 바가지 1만 원 주고 샀다.

화개면사무소 뒤편에 살고 있는 여 사장님은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했고, 사진가이기도 하다. 필자가 사는 화개골 사람들이 장에 나오면 이곳에 들러 편안하게 차를 한 잔 마시며 쉬었다 간다. 3·8장인 장날만 여는 찻집이다. 여 사장님의 소개 등으로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과도 인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대목 장날인데도 찻집에는 사람들이 없다. 예술가의 공간으로 느껴지는 이곳에 처음 왔을 때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어떤 고독한 장소의 분위기가 풍겨났다.

커피를 한 잔 마시며 한참 앉아 있으니 손님들이 밀려들어와 더 앉아 있기가 거북했다. 찻집에서 나와 찻길로 걸어 나오다 보니 오징어를 파는 트럭이 있어 1만 원 주고 다서 마리를 샀다. 그러다보니 손에 까만 비닐봉투가 3개나 되었다.

구례장에서 화개골로 오는 동안 필자를 따라 온 섬진강
구례장에서 화개골로 오는 동안 필자를 따라 온 섬진강. 

구례장을 떠나 화개골 목압서사의 집으로 향하였다. 오는 내내 마치 의도적으로 따라오는 듯한 섬진강의 푸른 물살을 보았다. 잠시도 멈추지 않고 저렇게 흐르는 강물은 무슨 생각을 할까라는 궁금증이 들었다.

인간의 나날은 언제나 걸음걸이가 위태로운데 섬진강물은 일 년 열두 달 내내 변함이 없는 것 같다. 몸부림치는 인간의 나약한 삶에 비하면 강은 이 겨울이 가고 다시 봄이 오더라도 일그러지지 않을 듯하다. 아마도 늘 허우적대듯 살아가는 필자를 위로하기 위해 계속 따라온 것은 아닐까.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박사 massj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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