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보는 사람 이야기 (31)이황의 형 이해가 귀양길에 사망한 까닭

조해훈 승인 2020.02.20 17:41 | 최종 수정 2020.03.22 15:10 의견 0
①이해의 문집인 『온계일고』 서문. 대산 이상정이 썼다.
이해의 문집인 『온계일고』 서문. 대산 이상정이 썼다.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 … 이해는 목숨이 실낱같이 붙어 있었으나 죽은 사람이나 다름이 없었다. 귀양 갈 사람이 아무리 다 죽게 되었더라도 목숨 지기 전에는 귀양길을 아니 떠나지 못하는 법이라 압송도사가 이해를 승교바탕에 담아가지고 배소로 작정된 갑산길을 떠났는데 첫날 양주읍이 숙소참이었다. 이 때 칠팔월 늦더위가 심하여서 성한 사람도 길에서 병이 날 것 같았으니 이해가 양주 숙소에 와서 죽은 것은 도리어 오래 부지한 셈이다. … …”

온계(溫溪) 이해(李瀣·1496~1550)가 세상을 버릴 때의 상황을 묘사한 내용이다. 소설의 내용은 『명종실록』의 이치(李致·1504~1550) 및 이해와 관련된 내용과 퇴계 이황이 찬술한 「묘지」(墓誌)의 내용를 비교해 보면 그다지 차이가 없다.

이해는 이황의 형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황에 대해서만 알고 있지 그의 형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이황의 형이 있었어?”라고 생각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해가 어떤 사람이기에 소설 『임꺽정』에 등장하는지 간략하게 살펴보자. 이해의 호는 온계로, 1528년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선 인재였다. 사간·정언·정랑 등의 벼슬에서 대사헌·대사간·예조참판을 거친 후 1545년 4월에 성절사로 북경에 갔다가 10월 귀국했는데, 수행했던 아들 복(宓)이 귀로 중 통주에서 병사했다. 1546~49년 사이에 장예원판결사, 황해도관찰사, 청홍(충청)도관찰사를 거쳐 1550년 한성부 우윤이 되었다. 그러나 옥사에 연루돼 신문을 받고 귀양을 가다가 양주에서 형독(刑毒)이 터져서 죽었다.

서두의 『임꺽정』에서 서술한 내용이 바로 양주에서 형독으로 죽은 내용이다. 이해의 생애를 기록한 「온계연보」를 보면 이해가 모진 국문을 견뎌내고 1550년 8월 12일 유배길에 올라 양주 마애리에 도착한 지 이틀 뒤인 14일 해시에 숨을 거둔 것으로 기록돼 있다.

『임꺽정』에는 이해의 주검과 관련한 내용이 더 나온다. 객주 주인이 상여곳간에 이해의 시신을 새끼로 말아 두자 백정인 임꺽정 부자가 관을 마련해 시신을 수습해준다. 하지만 관아에서는 백정이 의논도 하지 않고 그런 일을 하였다고 임꺽정을 형장치고 옥에 가둔다. 풀려난 임꺽정은 양주목사에 대한 증오심을 세상에 대한 증오로 키우게 된다.

「온계연보」에는 이해가 세상을 떠난 지 6일이 지난 8월 20일에 아들 영(寗)과 교(㝯) 등이 운구하기 시작해 28일 (죽)령을 넘고 9월 1일 경북 예안의 온계에 돌아와 빈소를 차린 것으로 돼 있다. 하지만 『임꺽정』에는 퇴계 이황이 열흘이 지나 양주에 도착해 운구하기 전날 밤 임꺽정의 집에 찾아가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한 후 떠났다고 서술돼 있다. 「온계연보」에는 이황이 양주로 가 운구를 했다는 언급이 없으니, 이 부분에 있어서는 소설적 허구가 가미된 것이다.

②『온계일고』 본문.
『온계일고』 본문.

그렇다면 이해는 어떤 일로 옥사에 연루돼 유배길에 숨을 거두었을까?

인종이 1544년 즉위해 이기(李芑·1476~1552)를 우의정으로 앉히자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문제를 제기해 그를 탄핵했다. 이때 이해가 대사헌으로 두 번째 일을 맡고 있을 때였는데, 이로 인해 이기가 이해에게 원한을 품게 됐다. 그 뒤 이해가 충청도관찰사로 있을 때 귀양을 살던 곳에서 몰래 도망 와 유신현(충북 충주)에 살던 최하손이란 자가 있었다. 이 자가 유신현 관리들의 회의록을 훔쳐 서울로 가 그들이 정변을 일으킨다는 책략을 꾸미려다 발각된다. 당시 현감 이치(李致)가 신문을 하는 과정에서 최하손이 죽는다.

충청도관찰사였던 이해는 ‘이홍윤 옥사’에도 연루된다. 이 옥사는 대윤파로 몰려 사사된 이약빙의 아들 홍남이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돼 영월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중, 1549년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그 아우 홍윤이 조정을 비난하는 말을 하자. 진사 강유선 등과 종실친척의 한 사람인 모산수를 추대하기로 모의했다고 무고해 처형당하게 한 사건이다. 이로 인해 희생된 사람은 주로 충주에 거주하던 이약빙의 문인들이었는데, 죽은 자만 사족과 서인을 합쳐 300여 명에 달했다. 이처럼 충주는 역적이 난 반역향이 돼 충청도는 청홍도(淸洪道)로, 충주는 유신현으로 강등됐다.

한편 사간 이무강이란 자가 우의정에서 밀려났지만 윤원형과 손잡아 영의정이 된 이기와 연을 만들어 출세를 하면서 이기와 원한이 있는 사람이면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다. 이무강은 인맥을 동원하고 여러 구실을 만들어 이해를 탄핵하도록 했다. 이기는 1545년에 우의정이 됐고, 1549년 영의정에 오른 인물로 윤원형과 함께 을사사화의 원흉으로 평가받는다.

이무강은 또 1548년 대사헌이 돼 이기를 탄핵하다 삭직돼 갑산에 유배됐고, 1550년 윤원형의 사주를 받은 대간의 탄핵으로 사사된 구수담과 이해가 서로 한 패거리라고 무함을 했다. 그리하여 결국 이해는 의금부의 감옥에 갇혀 이치와 함께 국문을 당했던 것이다.

③온계 이해의 유묵.
온계 이해의 유묵.

당시 현장이 너무 처참해 어떤 이가 “거짓으로라도 자백을 하면 목숨만은 건질 수 있다”고 하자, 이해는 “내가 어찌 죄를 범한 것이 없는데 거짓 자복해서 살기를 구하겠는가?”라고 굽히지 않았다. 이치는 국문 과정에서 사망했고, 이해는 갑산으로 유배명이 떨어진 것이었다. 이해는 경기도 양주의 민가에 이르자 열이 났고, 마침내 형독으로 1550년 8월 14일 쉰다섯으로 세상을 버렸다.

이해의 사후 흩어진 시와 산문 등을 모아 7세손 세택 등이 1772년(영조 48)에 4권 3책의 『온계일고(溫溪逸稿)』를 간행했다. 이해가 죽은 뒤에도 여전히 문정왕후의 비호를 받은 윤원형과 이기가 권력을 농단하는 사태가 지속됐다. 이황이 친형인 이해가 세상을 버렸는데도 묘지와 묘갈만 찬술했는데, 그건 아마도 형과 관련돼 또 다른 옥사에 연루되지 않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해의 경력 등을 감안한다면 그가 쓴 글은 더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박사 massjo@hanmail.net>

<참고자료>
-『명종실록』
-홍명희, 『임꺽정』, 사계절, 2008.
-김태안(1995), 「退溪學 硏究 資料集』 解題, 『退溪學」 7, 안동대학교.
-서수용(2018), 「退溪 逸詩에 대한 연구- 새로 발견된 親筆 逸詩에 대한 일고찰」, 『남명학연구』 59.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이종호(2006), 「온계 이해의 문학과 정신세계」, 『안동사학』 11, 안동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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