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이 전남 강진에서 유배살이를 하고 그곳에서 방대한 분량의 저술을 했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강진 이전에 경북 포항의 장기라는 곳에서 유배를 산 것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이번 호에서는 다산이 왜 장기로 유배됐으며, 그것에서의 생활에 대해 알아보겠다.
알다시피 천주교를 박해하는 사건인 신유박해가 순조 즉위 원년인 신유년(1801)에 일어났다. 이 사건에 대해 좀 더 들여다보면 나이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정순대비가 섭정을 하게 되는데, 그녀는 천주교를 사교(邪敎)·서교(西敎)라고 인식하고 이를 엄금·근절하라고 지시했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전도하던 정약용의 매형인 이승훈을 비롯해 남인에 속하는 권철신·홍낙민·이가환·정약종 및 중국인 신부인 주문모 등이 사형에 처해졌다.
정조와 남인 시파의 실권자인 채제공이 죽자 정계의 주도세력이 벽파로 바뀌면서 벽파는 남인 시파의 세력을 꺾기 위해 정순대비를 움직여 시파와 종교적 신서파(信西派)에 대해 일대 정치적 공세를 취하게 되었던 것이다. 많은 교인들이 체포됐고 300여 명의 순교자가 생겼다. 이 박해로 정약전은 전남 완도의 신지도에, 동생인 정약용은 장기(長鬐)현에 정배된 것이다.
40세에 들면서 유배길에 나선 다산 정약용이 1801년 2월 28일 새벽에 남대문을 출발해 충주를 지나면서 3월 2일 하담에 있는 부모님 묘지에 들렀다. 그 뒤 새재를 넘고 문경을 지나 장기현에 도착한 날은 3월 9일이었다.
장기는 공교롭게도 1675년(숙종1)에 서인(노론)의 영수였던 송시열(1607~1689)이 4년간 유배됐던 곳이다. 그런데 130여 년이 지나서는 남인정객의 유배지가 됐던 것이다. 정약용은 근기(近畿) 지방의 남인이었다. 이밖에도 조선 개국 공신 홍길민의 아들 대사헌 홍여방, 대사헌 양희지, 영의정 김수홍, 판서 신사철 등 많은 사람들이 장기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주지하다시피 1762년 경기도 광주부(현재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출생한 정약용은 28세인 1789년 대과에 급제한 이후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관료 생활을 했다. 곡산부사·동부승지·형조참의 등의 벼슬을 지낸 그는 문장과 유교 경학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천문·과학·지리 등에도 밝아 32세 때인 1793년에는 수원성을 설계하는 등 기술적 업적을 남기기도 했던 촉망받는 학자였다.
정약용은 장기에 도착하자 장기읍성 동문 밖 마산리의 늙은 포교 성선봉의 집에서 유배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유배 생활 220일 동안 무려 130수의 시를 남겼고, 『이아술』 6권과 『기해방례변』 등을 지었다.
그는 강진 유배 시절보다는 첫 유배지였던 장기에서 쓴 한시들이 더 많다. 시는 주로 장기지역의 풍물과 귀양 온 자신의 심경을 읊은 것들이다. 한시를 잠시 들여다보면 '초초한 옷차림이 결국 너를 속여서/ 십 년을 내달려도 피곤함뿐이로다./…/ 우습구나 내 인생 간데없는 바보로다.'(<나를 비웃다>), '맑은 시절 괴롭게 살 맞은 새가 되니/ 남은 목숨 그물에 걸린 고기나 다름없다.'(<살 맞은 새>) 등의 내용으로 자신의 심적 고통을 그대로 드러내기도 했다.
그가 이처럼 장기에서 저술과 독서를 통해 심신을 정리하고 있을 때 조정에서는 신유박해에서 참형을 면하고 유배 간 정약용 등 정적들을 다시 공격했다.
『순조실록』(1년 3월18일조)에 따르면 “… … 청컨대, 신지도에 정배한 죄인 정약전, 장기현에 정배된 죄인 정약용, 추조의 죄인 김백순, 임자도에 도배된 죄인 오석충, 단천부에 정배된 죄인 이기양은 다시 의금부로 하여금 엄중하게 국문을 가해 기필코 실정을 알아내게 한 다음 흔쾌히 형률을 바로잡게 하소서.”라고 했다. 이에 임금은 “마땅히 대신들에게 하문해 처분하겠다.”고 했다.
또 『순조실록』(1년 11월 5일조)의 기록을 보면 이 탄핵이 있은 후, 10월 3일 황사영(정약용의 큰 형인 정약현의 사위)이 제천에서 서학의 수괴로 붙잡히고 그가 소지하고 있던 백서에 나라를 어지럽히는 글이 있다 해 추국 당했다.
이에 신지도에 유배 갔던 정약전, 장기에 유배된 정약용, 능주에 유배된 이학규, 운봉에 유배된 신여권·이관기를 모두 불러다가 국문해 죄를 물었다. 그러나 특별하게 드러난 것이 없자, 다시 이치훈은 제주에, 정약전은 신안 흑산도에, 정약용은 강진에, 이학규는 김해에, 신여권은 고성에, 이관기는 장흥에 유배하도록 명했다. 삼사에서 번갈아 가며 상소하면서 “유배보다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청했으나 왕이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정약용은 황사영 백서 사건이 일어나자, 10월 20일에 장기에서 압송돼 27일에 한양 감옥에 갇혔다. 다행히도 11월 5일에 혐의 없음이 드러났다. 그렇지만 풀려난 것이 아니라 유배지가 바뀌어 전라도 강진으로 내려간 것이다. 둘째 형 정약전도 흑산도로 유배지가 바뀌었다. 서울에서 형 정약전과 함께 유배지로 내려간 정약용은 11월 21일에 나주에서 하룻밤을 같이 자고 11월 22일에 두 사람은 헤어졌다. 정약용의 강진 유배생활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그는 57세 되던 해인 1818년에 18년간의 유배생활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 75세인 1836년에 생을 마감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박사 massj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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