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보는 사람 이야기 (34)나뭇잎에 새겨진 글자 ‘주초위왕’과 기묘사화

조해훈 승인 2020.03.20 19:16 | 최종 수정 2020.03.20 19:45 의견 0
정홍래 / Public domain
경기도 용인의 심곡서원에 있는 조광조 영정.

조선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숱한 국가 자료들, 그리고 유교문집 등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문화유산을 많이 보유한 ‘기록의 왕국’이었다, 하지만 피로 얼룩진 당쟁이나 그 폐해가 없었던 왕조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이다.

이번 글에서는 조선 중종 시기에 시대를 앞서간 젊은 개혁가였지만, 그와 각을 세우던 훈구파에 의해 일찍 세상을 떠난 정암 조광조(1482~1519)와 관련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그 중에서도 벌레가 나뭇잎을 갉아먹어 만든(?) 글자와 관련한 기묘사화라는 정치 상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본관이 한양인 조광조는 개국공신 조온의 5대손으로 서울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감찰 조원강이고, 어머니는 여흥 민씨다.

그는 17세 때 어천찰방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무오사화로 화를 입고 평안도 희천에 유배 중이던 한원당 김굉필의 제자가 됐다. 이 때부터 성리학 연구에 힘써 점필재 김종직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의 영수가 됐다.

그는 1510년(중종 5)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해 진사가 됐고, 1515년(중종 10)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부터 중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해 중종의 제1계비인 장경왕후가 죽자 김정과 박상 등은 당시 폐위돼 있던 중종의 정비인 신 씨를 복위시킬 것과 신 씨의 폐위를 주장했던 박원종을 처벌할 것을 상소했다. 하지만 오히려 대사간 이행의 탄핵을 받아 이들은 귀양을 갔다.

이에 대해 조광조는 대사간으로서 상소자를 벌하는 것은 언로를 막는 결과가 되므로 이행 등을 파직하게 했다. 왕의 신임이 그만큼 두터웠던 것이다. 이것을 계기로 중종을 왕위에 세운 반정공신인 훈구파와 신진사류의 대립으로 발전했다.

정암 조광조의 문집인 『정암집』 표지(왼쪽)과 『정암집』에 실린 글들.

훈구파 중 홍경주·남곤·심정은 경빈 박씨 등 후궁을 움직여 왕에게 조광조를 위시한 신진사류를 무고하도록 했다. 또한 조광조 일당을 죽일 목적으로 대궐 뜰의 나뭇잎에 꿀물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고 써서 벌레가 갉아먹게 하였다. ‘주(走)’와 ‘초(肖)’의 글자를 합치면 ‘조(趙)’가 되므로, 조 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임금이 된다는 뜻이다. 궁녀로 하여금 이를 따서 (조광조가 임금이 되려 한다고 계략을 꾸민다는 의미에서)중종에게 바쳐 의심을 조장시켰다. 이에 중종은 조광조에 대한 신임이 크게 흔들렸다. 중종반정 이후 개혁정치를 펼치던 조광조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혹세무민이었다. 요즘말로 ‘가짜뉴스’였던 것이다.

조광조는 도학(道學)으로 세상을 바꾸고자 했다. 그는 미신을 타파함은 물론 불교와 도교 행사를 폐지해 유교적 사회질서를 바로잡으려 했고, 폐단이 많은 과거제도 대신 사림을 무시험으로 등용하는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해 참신한 인재를 정치에 참여시켜 유교적 이상국가를 실현하려 했다. 조광조의 문집인 『정암집(靜庵集)』에 그가 생각했던 세상에 대한 내용들이 들어있다. 당시 그가 중종에게 직언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법도가 정해지는 것과 기강이 서는 것은 일찍이 대신을 공경하고 그 정치를 맡기는 데 있지 않는 것이 없사옵니다. 임금도 혼자서 다스리지 못하고 반드시 대신에게 맡긴 뒤에 다스리는 도가 서게 됩니다. 전하께서 정말로 도를 밝히고 홀로 있는 때를 조심하는 것으로 마음 다스리는 요점을 삼으시고, 그 도를 조정의 위에 세우시면 기강은 어렵게 세우지 않더라도 정해질 것입니다.”

조광조는 현량과를 통해 신진사류들을 정계에 진출시켜 훈구파의 타파 및 개혁 등에 나섰다. 이들은 1519년 반정공신인 훈구파를 공격했다. 반정공신 2·3등 중 가장 심한 것은 개정해야 하고, 4등 50여 인은 모두 공이 없이 녹을 함부로 먹고 있으므로 삭제함이 좋을 것이라는 위훈삭제(僞勳削除)를 강력히 청했다. 그리하여 2·3등 공신의 일부, 4등 공신 전원, 즉 전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되는 76인의 훈작이 삭탈됐다. 이러한 급진적인 개혁은 마침내 훈구파의 강한 반발을 야기했다.

이에 홍경주와 공조판서 김전, 예조판서 남곤, 우찬성 이장곤, 호조판서 고형산, 심정 등은 밤에 신무문(神武門)을 통해 왕을 만나 조광조 일파가 당파를 조직해 조정을 문란하게 하고 있다고 탄핵했다. 이에 평소부터 신진사류를 비롯한 조광조의 도학정치와 과격한 언행에 염증을 느껴오던 중종은 훈구대신들의 탄핵을 받아들여 이를 시행했다. 결국 위훈삭제 불과 나흘 뒤인 11월 15일 밤, 전격적으로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그 결과 조광조는 김정·김구·김식·윤자임·박세희·박훈 등과 함께 투옥됐다. 처음 그는 사약을 받으라는 명을 받았으나, 영의정 정광필의 간곡한 비호로 능주(전남 화순)에 유배됐다.

하지만 훈구파의 김전·남곤·이유청이 각각 영의정·좌의정·우의정에 임명되자 이들에 의해 유배 된지 한 달 뒤인 그 해 12월 바로 사사됐다. 그때 조광조의 나이 37세였다. 바로 중종 14년인 1519년에 일어난 기묘사화다. 기묘사화로 현량과는 폐지됐고, 공신에서 삭탈된 훈구파들은 모두 복훈돼 재산을 되찾았다.

경기도 용인에 있는 조광조의 묘.

중종은 1515년부터 4년에 걸쳐 조광조 등 사림과 함께 개혁정치를 펼쳐왔으나 점차 신진사림의 과격한 개혁이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중종의 지지를 얻은 조광조와 신진 사림들은 성리학적 이상 정치를 강력하게 추구했으나, 이상적이고 원칙적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과격하고 급진적이었다.

조광조와 신진사류들이 실패한 이유는 그들이 대부분 젊은 데다 정치적 경륜도 짧을 뿐 아니라 개혁을 급진적이고 너무 과격하게 이루려다가 노련한 훈구세력의 반발을 샀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대저 정치란 무엇인가? 조선시대에는 백성의 안위보다는 정적을 제거하는 것을 능사로 아는 정치를 폈다. 지금은 어떨까?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박사 massj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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