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보는 사람 이야기 (26)평생 처사의 삶을 살았던 병곡 권구

조해훈 승인 2019.12.14 12:04 | 최종 수정 2019.12.14 12:23 의견 0
③가일마을에 있는 권구의 병곡종택.
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가일마을에 있는 권구의 병곡종택.

鬪者(투자) / 싸우는 사람

怒臂相交千嶙側(노비상교천인측)/ 천 길 낭떠러지에서 노한 팔뚝으로 서로 싸우나니
懸知飄碎在須臾(현지표쇄재수유)/ 자칫 떨어지면 틀림없이 몸이 부서질 것이로다.
可憐利害相形處(가련리해상형처)/ 불쌍하기도 하여라. 이해를 따지는 형편과 처지
只見絲毫不見軀(지견사호부견구)/ 터럭 같은 이익만 보고 제 몸은 보지 못하는구나.
-『屛谷集』 권1-

자, 독자들이 위 시를 읽으면 어떤 생각이 들까? 구체적으로 누구 작품인지 모르니 시의 행간에 깔려 있는 시인의 창작 의도를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시의 표면에 드러나는 의미만으로도 작은 이해 때문에 싸우는 자를 두고 지은 시임을 짐작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한 사람의 인생은 자신이 처한 여러 환경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조선시대에도 가문이 좋아 현달한 선비들이 있었고, 반면에 가문이 어려움에 빠져 세상에 나아가지 못하고 은일한 채 평생 학문을 연구하며 산 선비들도 있었다.

병곡(屛谷) 권구(權榘·1672~1749)의 집안은 안동을 대표하는 명문대족 출신답게 모친은 서애 류성룡의 증손녀이고, 자신의 아내는 갈암 이현일의 손녀였다. 퇴계학맥의 큰 산봉우리인 이현일이 일찍 권구의 학문과 인간됨을 사랑하여 손녀를 그에게 시집보낸 것이다.

그의 학문과 명성은 지금도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다. 권구가 고향인 가일마을(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에 은거하여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한 데는 별도의 이유가 있었다. 그는 선조들이 사화에 얽혀 희생된 경우를 기억하곤 일찌감치 세상에 나아가기를 포기했던 것이다. 자신도 나중에 큰 사건에 휘말리는 고초를 겪었다.

그의 학덕과 명성이 높아지자 많은 선비들이 찾아와 배움을 청했다. 이때 그는 강학공간인 서실을 만들었는데, 『논어』 한 구절에서 취해 ‘시습재’(時習齋)로 명명했다.

평생 처사의 삶을 살았던 권구의 후학들은 얼마나 될까? 그의 문하생들의 명단인 ‘지곡학계안1’(枝谷學稧案)에 417명, ‘지곡학계안2’에 608명의 명단이 들어있다. 이를 볼 때 학행이 뛰어났던 그에게 학문을 배우고자 한 제자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사진설명①권구의 문집인 10권5책의 『병곡집』.②『병곡집』의 내지.
권구의 문집인 10권5책의 『병곡집』과 그 내지. 

그는 이황 이래의 영남 남인계통 학문을 계승했으며, 이현일의 만년 제자이기도 하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 이후 남인계 재지사족은 중앙 정계로의 진출에서 완전히 배제되기 시작했다. 1728년 이인좌가 주도한 무신란이 일어나자 난의 참여층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권구는 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연루혐의가 있다고 안무사 박사수에 의해 서울로 압송돼 영조가 주재했던 국청에서 결국 혐의를 벗고 석방됐다. 그 후로도 그는 고향에 은거하면서 학문에만 진력하였다.

잠시 권구가 태어난 병곡종택(중요민속문화재 제370호)이 있는 가일마을에 대해서 조금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 마을은 고려를 개국할 당시 공을 세운 안동 권태사의 후예들 가운데 복야공파 권항이 입향한 이래 지금까지 600여 년 동안 안동 권 씨의 삶이 이어져온 집성마을이다. 가일마을에는 입향에서부터 지금까지 올곧게 살아온 안동 권 씨 후손들의 삶이 녹아 있다.

세종 때 정랑을 지낸 참의공 권항(1403~1461)이 가일마을의 부호였던 류서(하회 입향시조 류개의 손자)의 딸에게 장가들어 등과한 후 이 마을에 터를 잡으면서 안동 권 씨가 뿌리내렸다. 권항의 손자인 화산 권주(1457~1505)가 18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24세에 문과 급제를 하는 등 가통을 이어 가일마을의 안동 권 씨 문호를 열게 된다.

권주는 홍문관부제학, 충청도와 경상도관찰사를 지냈지만 연산군 10년 갑자사화에 연루돼 죽자 부인인 고성 이 씨가 자결하고 아들 권질이 유배를 가는 등 일가족이 참사를 맞았다. 권주의 둘째 아들 권전은 기묘사화 때 화를 입었다. 권질에게는 딸만 여럿 있었는데, 이 중 딸 한 명이 퇴계 이황의 둘째 부인이다.

권주의 넷째 아들인 권굉이 가계를 계승했고 권굉 역시 차남인 권의남, 그의 아들인 권호연의 손자인 권경행으로 가계를 이어왔다. 권경행 대에 와서는 외가인 경북 예천 용궁면 오룡리로 이주해 아들인 권박 때까지 살다가 손자인 권징(1636~1698)에 이르러 다시 가일마을로 돌아왔다.

권징의 아들로 가일마을의 안동 권 씨 가문의 위상을 드높인 이가 권구였다. 권구는 1716년에 병산(屛山)으로 이거했다가 1723년 지금의 가일마을인 지곡(枝谷)으로 돌아왔다.

어떤 풍수가는 안동의 풍산 들판을 바라보며 권구가 태어난 병곡종택이 자리잡은 가일마을은 황새가 물먹는 형국(鸛頭飮水)이라고 했다. 인공 저수지는 황새가 마시는 물이고, 뒷편 야산은 펼친 날개라는 것이다.

권구의 저술로는 『학용취정록』 등 여러 권이 있으며, 그의 글을 모은 문집으로는 1797년(정조 21) 병산서원에서 간행한 『병곡집(屛谷集)』 10권 5책과 고종 연간에 간행된 4권2책의 속집 등이 있다.

필자가 위에 기술한 내용들을 감안한다면, 이제 모두에 예로 든 권구의 시 <투자>가 어떤 의미인지 좀더 깊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박사 massj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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