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간에는 인연이라는 게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숱하게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그리고 군대와 직장, 퇴직 후에 만난 장외 사람들까지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가족을 제외하고 변함없이 꾸준히 만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우리가 만난 사람들에게 눈밭 위에 발자국을 하나씩 내보라고 한다면 사람마다 조금씩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은 성한 공간이 없을 것이다.
이 험한 세상을 살아낸다는 건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텔레비전 모니터처럼 기쁨과 슬픔, 여러 고민이 수시로 바뀌는 가운데 때로는 허탈함 속에서 허우적거리기도 하고, 폐부를 도려내는 듯한 아픔 속에서 비통해 하기도 한다.
오늘 필자는 구례로 가기 위해 화개 골짝을 내려오면서 떨어진 낙엽을 밟으며 혼자 무엇인가 중얼거리며 걷는 여자를 보았다. 추워 점퍼 모자를 푹 눌러쓴 여자의 속은 마치 슬픔을 견디지 못하여 산발한 채 히죽거리는 또 다른 사람이 들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복잡하고 다양해질수록 우리는 자신 외에 타인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또 다른 상처나 아픔을 숨기고 산다.
그렇게 본다면 필자는 겨울로 넘어가는 이 만추에 무어라고 단정할 수 없는 큰 행운을 누렸다. 지난 16~17일 양일에 걸쳐 필자가 사는 화개골의 벽소령 너머 함양에서 대학 시절 문학회 벗들과 해후를 한 것이다. 굳이 일부러 서로 껴안지 않더라도, 반가워도 내색하지 않고 팔짱을 낀 채 물끄러미 쳐다만 보더라도 강물 위에 쏟아져 흐르는 햇살처럼 우리의 우정이 다 드러나는 것이다. 30여 년간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 다른 음성을 내고 몸짓을 한 세월이 멍한 눈빛으로 있더라도 숨소리까지 읽어낼 정도로 교감이 된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징그럽다”, “그 정도 세월이면 이제 서로에 대한 감정이 흐릿할 때가 되었다”라고 말하겠지만, 우리는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건 바로 우리 모두 문청, 즉 언제나 시를 쓰려고 고민하는 영원한 문학청년들이기 때문이다.
징그러운(?) 벗들은 먼저 함양 오도재 인근에 마련한 율전(栗田) 정성기의 농장에 가 지신밟기(?)를 하면서 귀촌을 마음먹은 친구의 앞길에 좋은 일만 가득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회화나무 두 그루를 심었다.
필자도 내년이면 환갑이고, 모두 머리가 허옇거나 검은 물을 들이면서 늙어가는 중이다. 회장인 도재(陶齋) 황근희는 부인 안윤숙 여사를, 유인식은 부인 이명아 여사를 모시고(?) 참석했다. 노래를 잘하며 그렇게도 많이 마시던 술을 끊은 총무인 목헌(木軒) 박재범은 요즘 주현미의 트롯 노래에 심취한 듯 했다. 송담(松潭) 박주동은 같은 직장의 박하철(63) 선생님과 올해 39세인 권모 선생을 초대해 함께 참석했다. 간전(澗田) 이정희도 만사 제쳐놓고 서울에서 차를 몰고 밤에 도착했다.
이제는 만나도 “누가 술을 얼마나 마셨느니”, “그 친구는 왜 오지 않았을까?”라는 말을 아무도 꺼내지 않는다. 그야말로 남들 평생 마실 술을 우리 벗들은 이미 다 마셨고, 정말 자유롭고 마음 내키는 대로 전국 어디에서든 모여 찌들어 주름만 늘어가는 얼굴만 보면 그만인 것이다. 아이들처럼 손을 맞잡고 낄낄거리지도 않는다. 지난번에 만나고 오늘 만날 때까지 잘 있었구나, 라며 얼굴만 보면 행복한 것이다. 1년에 두 차례 이렇게 30여 년간 만나왔다.
필자가 언젠가 시에서 쓴 것처럼 모두 시를 껴안고 살아가지만 아무도 천년은 고사하고 100년 동안 살아남을 시 한 수 지을 만큼 뛰어난 시적 감수성을 가진 친구도 없다. 물론 필자도 마찬가지이다. 그래도 식지 않은 문청의 마음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율전은 내년에 시집 한 권을 펴낸다. 출판사와 시집 출판 스케줄이 잡혀 있다. 목헌도 가끔 쓴 시를 벗들에게 보여준다.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경주에 사는 운곡(雲谷) 박순철도 역시 쓴 시를 종종 보여준다. 통영에 있는 송정화는 드러내지는 않지만 시집 『거미의 우울』 이후 또 다른 시집을 준비하고 있을 게다. 과작인 부산의 이희철 역시 시집 『물방울에 길을 묻다』 이후 쉼 없이 시를 써 퇴고에 퇴고를 하고 있을 것이다.
지리산 자락인 함양 마천과 경계지역인 전북 남원 산내면의 산골짜기에 있는 한 펜션에 방을 잡아 하룻밤을 같이 잤다. 다들 늙어(?) 술은 젊었을 적의 반의 반도 마시지 못했다. 마음은 대학시절 정신없이 마시던 때와 변함없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것이다. 몇 잔 술에 취해 내뱉는 언어들이 마치 무슨 벌레들이 와글거리는 모습이다. 그래도 누구 하나 핀잔을 주지 않는다. 이어 무슨 말을 할지, 무슨 제스처를 쓸지 훤히 알기 때문이다. 그만큼 만난 세월이 무서운 것이다.
배고픈 대학생 때 같으면 숙소 앞의 사과나무에 달린 사과가 하나도 남지 않았을 터인데, 아침에 일어나 다들 난간에 기대서서 눈앞의 사과들을 보며 “약을 치지 않았나? 사과가 크지 않네.”, “사과가 맛이 있을까?”라며 쓸데없이 품평만 해댔다.
필자는 그 많은 시간들이 우수수 낙엽 떨어지듯이 지나간 것 같아 슬펐다. 그래도 날 흐려 곧 비가 오겠다는 예감에 대부분 어느 정도는 막혔을 혈관에 시에 대한 고민을 하느라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우리들만이 가진 피가 흐르는 소리를 들었다. 꽃이 지고 길에 굴러다니는 낙엽이 벗들의 가슴에 고스란히 담기는 모습을 보았다. 다들 아무런 말이 없다.
잠시 지나가는 햇살에, 아니면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허공에 그러한 마음이 들켰는지 한 마디씩 흰소리를 해댄다. 자신들의 시심을 사과밭에 두툼하게 쌓여 있는 부엽토처럼 속으로 계속 묻는 모양이었다.
숙소 식당에서 따뜻한 김치찌개로 아침의 쓰린 속을 채우고 헤어지기 전에 기념사진을 한 장 남기기로 했다. 내년 봄에 다시 만날 때까지 하나같이 시를 끌어안고 각자 몽유 속을 헤맬 것이다. 아직 그리운 것들이 푸르게 남아 있는 우리 문청들의 가슴, 악수를 하며 울컥해 괜히 친한 척(?) 서로 끌어안으며 등을 툭툭친다. 붉은 꽃송이 피어나던 우리의 시절은 지나갔건만...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박사 massj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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