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지리산 산책 (33)화개골을 감동시킨 화개초등학교 학예회

조해훈 승인 2019.11.15 14:19 | 최종 수정 2019.11.15 14:27 의견 0
‘화개동천 별천지 초록향기’ 주제로 14일 경남 하동군 화개면 화개초등학교에서 열린 학예회에서 3~4학년 아이들이 합주를 하고 있다.
‘화개동천 별천지 초록향기’ 주제로 14일 경남 하동군 화개면 화개초등학교에서 열린 학예회에서 3~4학년 아이들이 합주를 하고 있다. 사진=조해훈

올 들어 처음으로 화개골이 영하로 내려갔다. 올해도 어김없이 수능을 치르는 날의 입시한파가 온 것이었다. 하지만 추운 날씨를 무색하게 한 따뜻한 온기가 지리산에서 가장 깊은 골짜기라는 화개골에 훈훈하게 퍼져나갔다.

화개골 초입 무렵에 있는 화개초등학교 2층 목련관에서 전교생 50여 명이 모두 참가한 학예회가 열린 것이다. 학부모들은 물론 이 골짜기의 많은 주민들이 학예회에 참석하여 함께 즐기면서 아이들에게 격려를 해주고 박수를 쳤다.

필자도 지역 주민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였다. 학교에 들어서는 순간 초등학교 때의 희미한 기억들이 겹치면서 설렘과 따스한 마음이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피어올랐다. 교실을 행사장으로 개조한 목련관은 공간이 작았지만 분위기가 밝아 필자도 모르게 얼굴이 환해졌다. 화개중학교 교장 선생님과 화개교회 목사님, 주민 등 여러분을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프로그램은 다양하였다. 먼저 화개골이 차향의 본고장 답게 3~6학년 다례부 아이들이 예쁘게 다례 시연을 하였다. 행사가 몇 개 진행된 후 방과후 학교 강사님이 학부모들을 위해 ‘추억의 7080’ 주제로 기타 연주를 하며 흘러간 노래를 불러 앙코르를 받았다.

이어지는 행사 중에 ‘6학년과 가즈아~’라는 프로그램에서 덩치가 어른만한 6학년 아이들이 음악에 맞춰 무대가 내려앉을 정도로 복고댄스를 신나게 추자 참석자들은 리듬에 박수를 치며 웃음을 참지 않았다. 아마도 어른들이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시끄러운 세상을 살면서 이처럼 모든 잡념과 고민을 잊고 즐거움과 기쁨에 몰입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을 것이다. 필자는 얼마만에 느끼는 큰 행복감인지 가슴이 뭉클하면서 눈가가 잠시 촉촉해졌다.

3~4학년 모두가 펼치는 ‘우리는 화개 음악대’에서는 참가 어린이마다 각각 하나의 악기를 들고 나와 연주를 하는 모습을 보니 신기했다. 박수를 치며 “저 어린 아이들이 어쩌면 저리도 하나도 틀리지 않고 합주를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니 기특하기만 했다.

이어 ‘그대에게’라는 프로그램으로 1~2학년 학생 전원이 치어댄스를 하는 광경에 참석자들은 아이들의 귀여움에, 고사리 같은 모습으로 리듬에 맞춰 똑같이 맞추는 동작에 감격하여 “우짜면 저리 잘하노!”라며 사진을 찍고 손바닥이 터져라 박수를 쳤다.

필자는 화개골에 살면서도 가끔 여러 도시의 이런저런 공연을 관람하러 가는 경우가 있는데, 때로는 별 감흥도 없이 의무적으로 치는 박수에 비하면 이 아이들의 진지함과 눈망울에 마음 가득 감동하여 큰 손으로 박수를 길게 쳤다.

아이들이 준비한 행사가 끝나고 교장 선생님이 마무리 인사를 하자 각자 교문쪽으로 걸어나왔다. 그 누구의 얼굴에도 슬픔이나 삶의 힘듦이 보이지 않았다. 먹고 살기가 간단찮은 이 골짜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나름의 사연들을 큰 웅덩이처럼 갖고 있지만 파편으로 공중에 흩어버렸는지 행복한 표정뿐이었다.

필자에게도 흑백사진 속에 박제된 흐린 날의 하루가 아니라 총천연색으로 기쁨이 부풀려지고 또 넓게 퍼진 시간이었다. 깊은 산꼴짜기의 소박하고 작은 초등학교 아이들 덕분에 지치고 병든 필자의 아픔들이 유리문에 깃대어 들어온 햇빛을 받으며 꿈처럼 흐물흐물 빠져나간 날이었다.

세상이 문명화·물질화 될수록 우리의 삶은 언어와 위선으로 포장되지만 영혼이 순수한 화개초등학교 아이들은 엄마와 아빠는 말할 것도 없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의 외로운 상처들을 따뜻하게 감싸주었던 것이다. 순수한 시간에 몸과 마음을 맡긴 어른들은 사실 알고보면 저마다 이 큰 세상에서 뎅그러니 버려진 존재가 아니던가.

학예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스스로 말로 뱉어내지는 않지만 “사느라 다 해진 영혼이 오늘 아이들의 맑은 감성에 깊이 닿아져 한량없이 기쁘다”고 나직이 필자에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화개골에 들어와 손가락과 팔목에 고장이 생기도록 어설프게 차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필자의 미욱한 마음도 웅숭 깊어진 하루였다.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박사 massj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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