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달 6일 아침부터 겨울비가 내렸다. 오늘 오후 6시30분에 ‘추사 김정희와 초의선사의 차(茶)를 통한 교유(交遊)’ 주제로 목압서사(경남 하동군 화개면 맥전길4)에서 인문학 특강이 예정돼 있었다. 해가 지자 비는 더 많이 내렸다. 이 겨울비를 뚫고 과연 강의를 들으러 올까 은근히 걱정이 됐다. 아래채의 학의재(學宜齋)는 제법 공간이 넓으나 난방 시설이 없다. 추위에 강의실로 쓰기 힘들어 목압문학박물관과 목압고서박물관이 있는 본채의 좁은 공간에서 할 수밖에 없었다.
시작 10분 전인 6시20분이 되자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고 몇 명이 들어왔다. 시작 전에 12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자리를 급히 마련한 후 차를 우려냈다. 전시 중인 자료들도 옆으로 치웠다.
강의 수준을 어디에 맞춰야 할지 고민을 하다 시민강좌를 할 때 수준으로 하면 되겠다 싶어 그렇게 설명을 하곤 강의를 시작했다. 먼저 조선조 훈척 가문의 하나인 경주 김 씨 문중에서 출생한 추사 김정희(1786~1856)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를 했다. 다음은 이날 강의한 내용을 최대한 요점 정리한 것이다.
병조판서를 지낸 그의 아버지인 김노경이 중국 연경에 동지부사로 갈 때 24살인 추사가 따라가 두 달간 머물다 돌아왔다. 이때 연경에서 그는 평생의 스승인 최고의 금석학자였던 옹방강(1733~1818)과 완원(1764~1849) 같은 유명한 유학자를 만났다. 완원의 서재에서 중국 최고차인 용단승설차를 맛보면서 차의 세계에 빠져들었고, 옹방강으로부터는 한·진의 옛날 비문의 글자체부터 익혀야 제대로 된 서예를 할 수 있다고 가르침을 받았다. 이는 그가 평생 차인으로서 차를 마신 계기가 됐고, 또 자신만의 독특한 추사체를 확립하는 기초가 됐다. 추사가 북한산순수비를 발견한 것도 그 연장선상이었다.
추사와 동갑인 초의는 전남 무안 출신으로 15살에 출가해 해남 대둔사(현 대흥사)에서 공부를 하다 1809년 다산초당의 다산 정약용을 찾아가 제자가 돼 유학경전과 한시 등을 배웠다. 이때 다산이 48세, 초의가 24세였으며, 초의는 그 후로 대둔사와 다산초당을 오가며 다산으로부터 유학을 공부했다. 이에 앞서 대둔사에서 다산초당 인근인 백련사에 온 아암 혜장 스님은 다산으로부터 차를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 초의도 마찬가지였다. 다산은 혜장으로부터 차를 얻어 마셨다.
1815년 초의가 첫 서울 나들이를 해 다산의 아들인 정학연과 정학유를 만나고 추사도 처음 대면했다. 이 두 사람의 두 번째 만남은 1817년 초의가 서울에 걸음을 해서이다. 초의는 1830년에 일지암 현판을 걸었다. 1830년에 초의가 스승 완호 스님의 ‘삼여탑비’의 비문을 받기 위해 상경했을 때 추사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초의가 만든 차를 맛본 박영보가 20행이나 되는 <남차병서>를 지어 초의의 차를 널리 알렸다. 박영보의 시에 그의 스승인 자하 신위가 화답해 초의 차가 더 많이 알려지게 됐다.
추사는 1840년 9월 4일 제주도에 위리안치 명을 받아 그해 9월 27일 전남 완도에서 배를 타고 유배지로 향해 10월 2일 제주도 대정현에 도착했다. 추사가 대정현에 있는 군교(軍校)인 송계순의 집을 처음 유배지로 삼아 지내다가 이후 강도순의 집으로 옮겼다. 현재 이곳은 추사유물전시관이었다가 ‘제주 추사관’으로 재건축돼 운영되고 있다.
추사의 유배살이 넉 달 만인 1841년 2월에 소치 허련이 찾아왔다. 소치가 추사를 만난 것은 1839년 8월 월성위궁에서였다. 소치는 추사와 4개월을 보낸 후 돌아갔다. 1842년 11월 13일에 추사의 아내 예안 이 씨가 세상을 떴다. 추사가 상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위로 차 1843년 봄에 초의선사가 제주도로 추사를 방문했다. 6개월쯤 지나 초의는 육지로 돌아갔다. 그 무렵 소치가 두 번째로 추사를 찾아왔다.
추사 나이 59세인 1844년 유배된 지 5년째에 추사는 제자 이상적에게 <세한도>(국보 180호)를 그려 주었다. 이상적이 스승인 추사에게 여러 책을 보내준 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추사의 회갑 이듬해인 1847년 봄에 소치가 세 번째로 방문했다. 마침내 추사는 1848년 12월 6일에 햇수로 9년, 만으로 8년 3개월 만에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났다.
추사가 초의의 차를 구해 마신 것은 1838년 전후로 추정되고 있다. 이때부터 추사가 1850년 전후까지 초의에게 쓴 편지가 50여 통이나 된다. 이중 차를 좀 보내달라는 등 차와 관련된 내용이 15통 내외다. 그러니까 제주도에 있으면서도 지속적으로 추사는 초의의 차를 얻어 마신 것이었다.
추사체는 제주 유배지에서 확립됐다는 평을 받는다.
제주도에서 완도에 도착한 추사는 대둔사로 가 초의선사를 만났다. 초의선사를 만난 후 추사는 충남 예산의 고향집으로 왔다 몇 달 뒤 삼호의 강상으로 터전을 옮겼다. 강상으로 소치도 찾아오고 초의도 찾아왔다. 그러다 추사는 1851년 7월 22일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명 받아 귀양살이를 하다 1852년 8월 13일 해배됐다. 부친 김노경이 마련해둔 과천의 과천초당에서 생의 마지막 4년을 조용히 보내다 71세인 1856년 10월 10일 추사는 세상을 버렸다. 초의는 추사 사후 2년이 지난 1858년 2월 22일에 찾아와 제문을 지어 바쳤다.
정민 한양대 교수의 “조선후기 차문화사에서 다산이 중흥조였다면 초의는 이를 든든히 뒷받침해 새 길을 연 전다박사였다. 하지만 추사가 없었다면 초의의 존재가 그렇게까지 빛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말을 곰곰이 생각해본다.
강의를 마친 후에도 비는 여전히 많이 내리고 있었다. 지리산 깊은 골짜기라 바깥은 암흑 천지였다. 목압서사의 마당이 좁아 주차한 차량들이 힘들게 후진을 해 빠져나갔다.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박사 massj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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