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잘 알고 있는 추사 김정희(1786~1856) 의 <세한도>(국보 180호)는 제주도 유배시절 제자인 이상적에게 그려준 것이다. 이상적은 역관으로 청나라를 다녀오면서 책을 좋아하는 스승을 위해 여러 책을 선물하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답으로 세한도를 그려 선물한 것이다.
또한 추사는 제주 유배시기에 그의 독특한 필체인 추사체를 완성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제주에 있을 때 제자인 소치 허련이 두 차례나 방문하였고, 동갑 벗인 초의선사가 찾아왔다. 그의 아내도 제주 시기에 사망하였다.
이처럼 추사가 적소인 제주에 있을 때 여러 일이 있었으므로, 이번 글에서는 위에 적시한 내용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먼저 그가 어떤 연유로 제주도에 유배를 갔는지에 대해 알아보자.
추사는 10년 전에 있었던 윤상도(1768~1840)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830년 윤상도가 호조판서 박종훈 등이 부정을 저질렀다는 상소를 했는데, 그 상소 배후 조종 혐의로 추사의 생부인 김노경이 절도안치를 명받아 전남 완도군에 있는 고금도에 유배된 적이 있다. 그러면 윤상도의 옥사란 무엇일까?
윤상도는 1807년(순조 7)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부사과에 올랐다. 그러다 1830년 호조판서 박종훈과 유수를 지낸 신위, 그리고 어영대장 유상량 등을 탐관오리로 탄핵하다가, 군신 사이를 이간시킨다는 이유로 왕의 미움을 사서 제주의 추자도에 위리안치 당하였다. 1840년(헌종 6) 유배지로부터 의금부에 압송되어 국문을 받다가 아들 윤한모와 함께 능지처참되었다.
그런데 김노경은 윤상도의 상소를 부추겼다는 이유로 유배를 갔던 것이다. 1834년 조선후기 제23대 순조의 뒤를 이어 헌종이 즉위하자, 순조의 왕비로 안동 김씨인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헌종과 철종 때 두 번의 수렴청정을 하였는데, 그것은 친정인 안동 김씨가 세력을 확장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즉위 15년 만에 헌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한 후에도 계속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제2차 안동김씨 세도의 중심인물이 된 김문근의 딸을 철종비로 맞아들임으로써 안동 김씨의 세도가 절정에 이르게 하였다.
그리고 이 사건은 마무리 된 듯 했는데 헌종 초에 안동 김씨가 이걸 다시 끄집어냈다. 1840년(헌종 6년)에 이르러 대사헌 김홍근이 10년 전의 윤상도 사건을 끄집어내어 재심의 논죄를 상소했다. 그 결과 윤상도와 함께 상소를 올렸던 그의 아들은 윤상도를 국문하는 중에 조선참판 김양순의 공술에 “윤상도의 상소는 김정희가 기초한 것”이라는 내용이 있어 김정희가 연루되었다. 이에 따라 추사가 끌려나와 가혹한 형문을 받게 되었다. 김정희는 김양순의 허위진술이라고 말하였지만, 이미 김양순은 윤상도에 연좌되어 형문을 받던 중 죽게 되어 무실을 입증할 방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추사는 1840년에 제주도 대정현으로 위리안치 되어 1848년 12월 6일 풀려날 때까지 8년3개월 유배를 산 것이다. 위리안치는 천극(荐棘) 죄인이라 하여 곱절로 가혹한 징역으로 집 주위에 가시울타리를 두르고 그 안에서만 살게 하는 것으로, 대개 당쟁으로 인한 죄인들이 이 형을 받았다. 추사는 1840년 9월 4일 제주도 대정현에 위리안치 명을 받았다.
그는 유배지로 가던 중 해남 대둔사로 가 일지암의 초의선사를 만난 후 9월 27일 완도에서 제주로 가는 배를 탔다. 제주목 관아에서 10리 떨어진 항구인 화북진에 도착하였다. 추사 이전에 우암 송시열이 이 항구로 유배 살러 들어왔고, 추사 이후엔 면암 최익현이 이곳을 거쳐 갔다. 추사가 10월 2일 대정현에 도착하여 처음 대정읍성 안동네에 있는 송계순의 집을 유배지로 삼았다가 이후 강도순의 집을 빌려 유배를 살았다. 강도순의 집에서 가장 오래 거주하였다. 추사가 쓴 편지와 집으로부터 오는 음식과 옷 등의 심부름은 대갓집이었던 그의 집안의 여러 하인들이 맡았다.
귀양살이가 시작된 지 넉 달이 지난 1841년 2월에 소치 허련이 유배지로 찾아왔다. 허련은 추사의 유배소에 넉 달간 있으면서 시·서·화를 배웠다. 그러다 6월 8일 허련은 중부께서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육지로 올라갔다.
유배 온 지 3년째인 1842년 11월 13일, 추사의 아내인 예안 이씨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한 달 뒤인 12월 15일에 부음을 들었다. 그걸 모르고 11월 18일 아내의 지병을 걱정하는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이듬해인 1843년 봄에 일지암의 초의선사가 유배지로 찾아왔다. 초의는 6개월간 함께 지내다 육지로 돌아갔다. 초의가 육지로 올라가기 위해 대정을 떠나 제주성에 당도했을 때 마침 새 제주목사인 이용현이 부임했는데, 허련이 그를 따라 다시 제주로 온 것이다. 스승인 추사에게서 부지런히 배우며 제주목사 막하에서 일하던 허련이 마침내 제주도를 떠나자 추사는 제자인 전라우수사 신헌에게 허련을 소개하였다. 이후 허련은 전라우수사 신헌 밑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스승인 추사를 지극하게 모셨다.
제주에 유배 온 지 5년이 되던 1844년 추사 나이 59세 때 <세한도>를 제작하였다. 추사의 귀양살이 4년째인 1843년에 제자 이상적이 『만학집』과 『대운산방문고』를 연경에서 구해 제주도로 보냈다. 이듬해인 1844년에는 120권 79책으로 엄청 방대한 『황조경세문편』을 보내주었다. 그리하여 추사는 변함없는 이상적의 정성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세한도를 그려준 것이다.
제주 시절 추사의 글씨는 변화하였다. 유홍준 교수는 “글씨의 뼈대야 귀양 전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획의 삐침, 뻗음, 내리그음이 구양순체의 힘 있는 결구를 넘어 비문 글씨의 굵고 묵직한 필획을 느끼게 한다. 이른바 금석기가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추사의 글씨는, 골격은 힘이 있고 필획은 울림이 강하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추사체”라고 정의하였다.
한학자이자 금석학자였던 청명 임창순은 “그(추사)의 새로운 스타일의 서체는 (제주)유배생활을 하는 중에 완성되었다. … 만일 조정에 들어가서 높은 지위를 지키며 부귀와 안일 속에서 태평한 세월을 보냈다면 글씨의 변화가 생겼다 할지라도 꼭 이런 형태로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추사체가 제주 유배시절 완성되었음을 논증하고 있다.
한국회화사를 개척한 동주 이용희는 “자기 멋대로, 맘대로 해도 누가 뭐랄 사람도 없고, 부끄러울 것도 없었던 것이죠. 그러니까 그런 특이하고 괴이한 개성이 나온 거 아니겠어요.”라며, 사람들이 괴(怪)라고까지 말하는 글씨 형태인 추사체가 나오게 된 것을 말하기도 했다.
마침내 추사는 1848년 겨울인 12월 6일 귀양에서 풀려났다. 물론 그의 귀양은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1851년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의 일에 연루되어 또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풀려 돌아왔다. 이후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다가 71세로 생을 마쳤다.
추사의 이러한 삶의 과정은 그의 문집인 『완당선생전집』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필자는 지난해 3월 6일에 제주목사가 행정을 펼쳤던 제주관아를 거쳐 복원된 강도순의 집과 제주 추사관을 둘러보면서 하루를 보냈다. 추사관에 있는 <세한도> 전체를 오랫동안 보면서 전율을 느끼긴 것은 물론 인간의 한계상황을 보는 듯한 상념에 잠기기도 했다. 그전에는 충남 예산에 있는 추사 고택에 가 그의 삶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기도 하였다.
<참고자료>
-『조선왕조실록』 헌종條.
-『완당선생전집』
-유홍준(2018), 『추사 김정희-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창비.
-이용희(1996), 『우리 옛그림의 아름다움』, 시공사.
-임창순(1985), 「한국 서예사에 있어서 추사의 위치」, 『한국의 미 17: 추사 김정희』, 중앙일보사.
-정후수(1996), 「추사 김정희의 제주도 유배생활」, 『한성어문학』.
-조평환(2007), 「추사 김정희의 유배서간에 나타난 제주의 생활정서」, 『동방학』.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박사 massj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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