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어제 쌍계사 앞에서 농어촌버스를 타고 화개면 소재지에 가 볼일을 본 후 버스를 타고 쌍계사를 지나 신흥에 내렸다. 며칠 전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제주 유배 시기’ 주제로 글을 쓴 적이 있어 나온 김에 추사의 생부인 김노경이 경상도관찰사 재임 중 옛 신흥사(현 화개초등학교 왕성분교) 인근 계곡에 가 고운 최치원의 글씨로 알려진 세이암((洗耳嵓)을 구경하는 등 풍류를 즐기곤 방문 기념으로 옆 바위에 수행한 인근 고을 현감들과 함께 이름을 새겨놓았기 때문이다. 필자는 가끔 지인들을 안내하여 이 각자를 보여주며 역사적인 설명을 해주곤 하였다.
그런데 어제 세이암이 각자된 바위로 건너는 곳의 물살이 세고 깊어 건너지 못하고 근처를 맴돌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사진을 찍고 돌아왔다. 소나기가 내리는 오늘 3월 26일 아침에 다시 300mm 망원렌즈를 챙겨가 촬영을 하였으나 빗속이라 글자가 선명하지 못하였다. 평소에도 글자가 흐릿하여 제대로 알아보기 힘든 상태였다.
어쨌든 필자가 살고 있는 경남 하동군 화개면 화개골은 추사 김정희 가족과 인연이 있다. 이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추사의 생부인 김노경(1766∼1837)은 1816년 11월에서 1818년 12월까지 경상도관찰사(지금의 도지사)를 지냈다. 생부라고 하는 이유는 추사가 아버지 김노경과 어머니 기계 유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지만, 큰아버지 김노영 앞으로 양자로 들어가서 그 집의 대를 이었기 때문이다.
경상도관찰사가 업무를 보던 감영(지금의 도청)은 몇 곳으로 이전하는 등의 여러 과정을 거쳐 김노경이 관찰사로 재직할 당시는 대구에 있었다. 경상도관찰사는 조선시대 8도 중 경상도의 장관으로 종2품 문관이었으며, 임기는 2년이었다. 관하의 부윤·목사·부사·군수·현령·현감 등을 지휘 감독하였다.
김노경이 관찰사 임기를 4개월가량 남겨둔 1818년 53세 때 화개골에 행차하였다. 순조 18년인 무인년 음력 7월 15일 보름날 한창 무더운 때였다. 김노경의 이 순시 때 추사의 동생인 김명희와 산청 현감 등 인근 고을의 수령들이 동행하였다. 이들은 계곡 바닥의 큰 바위에 새겨진(인근 바위에도 누군가 별도로 세이암 글자를 새겨놓았음) 세이암 등을 둘러본 후 정사를 논의하고 풍류를 즐기며 참석한 관원들 이름을 우측 바위에 새기고 기념하였다. 사진기가 없던 당시에는 관료들의 방문 시 바위에 직책과 이름을 새기는 게 관례였다.
김명희(1788~1857)의 경우 ‘진사 김명희’라고 적혀 있다. 그건 그가 1810년 진사에 합격하였기 때문이다. 부친 김노경과 형 김정희는 대과에 급제하였지만 그는 대과엔 급제하지 못하였다.
이 행차와 관련해서는 자료부족으로 더 이상의 내용은 알기 어렵지만 어쨌든 지리산 깊은 골짝인 화개골에 김노경이 둘째 아들과 함께 온 것만은 분명하다.
다음은 추사와 화개와의 인연에 대한 내용이다.
필자의 집에서 700, 800m가량 떨어진 쌍계사의 금당(金堂)에 가면 좌우로 현판이 2개 걸려있다. 금당 앞에 서서 봤을 때 오른쪽에 ‘세계일화조종육엽(世界一花祖宗六葉)’, 왼쪽에 ‘육조정상탑(六祖頂上塔)’이라 적혀 있다. 이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쓴 것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당대 최고의 서예가로 알려진 추사의 글씨가 이 화개골에 있는 것일까? 일부에서는 추사가 직접 쌍계사로 와 쓴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한 번 살펴보자.
추사의 문집인 『완당선생전집』 권3은 추사가 벗인 권돈인에게 쓴 편지 ‘여권이재돈인(與權彛齋敦仁)’이 있다. 여기에 아주 귀한 내용이 들어있다. 44세 때 동지 겸 사은부사로 명나라 연경에 가는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추사가 24세 때인 1809년 10월 연경에 가 두 달 동안 머물렀다. 여기서 평생 가슴으로 모신 스승 두 사람을 만났다. 한 사람은 담계 옹방강(1733~1818)이고, 또 한 사람은 운대 완원(1764~1849)이다. 추사는 옹방강과의 만남으로 보담재라는 당호를, 완원과의 만남으로 완당이라는 아호를 갖게 된 것이다. 완원은 추사를 자신의 서재로 데려가 희대의 명차라는 용단승설(龍團勝雪)을 맛보게 하였다. 추사는 이 승설차 맛을 잊지 않고 있었는데 쌍계사 금당에서 차를 만들며 수행을 하던 만허 스님의 차를 마시곤 40여 년 전 연경에서 맛보았던 용봉승설의 여운을 회상하였던 것이다.
만허의 차맛을 이야기할 무렵인 1850년께는 65세 전후였던 추사가 1848년 12월 6일 제주도 귀양에서 풀려나 서울 용산에 있는 강변마을인 강상(江上)에 머물던 시기다. 강상에서 2년 반을 살던 추사는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의 일에 연루돼 함경도 북청으로 또다시 유배를 갔다.
강상 시절 권돈인에게 보낸 이 편지로 볼 때 추사는 만허 스님이 만든 차가 중국의 명차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아주 뛰어난 차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편지 내용으로 볼 때 곡우를 전후하여 처음 돋아나는 찻잎으로 만드는 지금의 우전(雨前)이 아니었을까? 그건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 ‘개미같이 어린 차 싹을 금탑에서 모아 만든다 하니’라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또 ‘그 사람이 내 글씨를 매우 좋아하니 이리저리 하면 서로 기쁘게 바꾼다고 말한 겁니다’라는 내용도 있어 추사가 만허 스님에게 (금당의 현판) 글씨를 써 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하여 추사는 명차를 준 만허에게 김과 금당 육조탑에 차를 올릴 때 쓸 귀한 찻종 한 벌, 그리고 자신의 글씨를 보내 차를 받은 데 대한 답례를 정중히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추사가 만허를 위해 지은 시 서문에서 확인된다. 만허가 만든 차 맛에 감동한 추사는 <희증만허(戱贈晩虛)>와 <차사이정쌍계(茶事已訂雙鷄)>를 지어 답례하였다. 아래의 시 내용을 꼼꼼하게 읽어보면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열반이란 마설로 헛된 세월을 보내니(涅槃魔說送驢年)/ 그대만은 눈 바로 박힌 사람을 귀하게 여기겠지(只貴於師眼正禪)/(나는)차를 마시는 일과 또 학문하는 일을 겸했으니(茶事更兼參學事)/ 금탑의 빛을 흠씬 받은 차를 마시라고 권하겠지(勸人人喫塔光圓)”(<희증만허(戱贈晩虛)>, 『완당선생전집』 권10)
“쌍계사 봄빛, 오랜 차 인연(雙鷄春色茗緣長)/ 제일 가는 두강차는 육조탑 아래에서 빛나네(第一頭綱古塔光)/ 늙은이 탐냄이 많아 이것저것 토색하여(處處老饕饕不禁)/ 입춘에 다시 향기로운 김 보낸다고 약속했네(辛盤又約海苔香)”(<차사이정쌍계(茶事已訂雙鷄)> 『완당선생전집』권10)
김노경보다 74년 전인 1744년에 경남 함안에 살던 이계 황도익(1678~1753)이 이 계곡을 찾아 세이암 등을 완상한 뒤 자신의 「두류산유행록(頭流山遊行錄)」에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호사가들이 바위에 ‘세이암’ 글자를 새겼는데, 사람이 이곳에 도달하면 누가 맑은 물에 귀를 씻지 않으려고 하겠는가? … 기암괴석이 앞뒤로 엇갈려 있는데 자못 형태가 기이하다. 다투어 머리를 내밀고 있으니 귀신이 깎거나 새기지 않았다면 어찌 이와 같이 되겠는가? 앞 선 사람의 시에 ‘지리산의 쌍계는 금강의 만폭의 아름다움보다 낫다(智異雙溪勝金剛滿瀑奇)라고 하였는데 이에 지리산의 승경이 쌍계의 골짜기에 다 있는 것을 알 수 있다…”(『이계집(夷溪集)』 권13)라며, 세이암이 있는 이 골짜기를 귀신이 만든 공간이며, 금강산의 만폭보다 더 아름답다고 형용한 것이다.
이처럼 지리산 중에서도 가장 깊은 골짜기에 속한다는 화개골에 조선 후기에 가장 유명하였던 인물 중 한 명이었던 추사의 가족과 인연이 있었다는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이곳에 사는 필자로서는 화개가 아주 중요한 길지(吉地)라고 생각한다. 추사 가족 외에 이러한 것을 뒷받침 할 수 있는 다른 역사적 내용도 많으므로, 기회가 되면 다른 글에서 또 소개하겠다.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박사 massj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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