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와 목이 부서진 것처럼 아프고 움직이기 힘들어 일찍 일어날 수가 없었다. 오늘 오전 9시 반쯤 억지로 일어나 허리를 움켜잡고 마당의 손바닥만 한 텃밭에 마늘을 심었다. 어제는 상추와 생강을 좀 심었다. 그런 다음 아침을 먹은 후 스틱을 짚고 오전 11시15분쯤에 버스를 타러 갔다. 스틱을 짚어도 허리를 펼 수 없어 영락없는 시골 할아버지 모습이었다. 몸이 아프니 옷도 갈아입기 귀찮아 작업복에 작업화를 신은 채였다. 마을 앞 도로의 버스 승강장에 한참 서 있으니 구례행 농어촌버스가 와 탔다. 구례의 이 버스는 요금이 올해부터 인하돼 구간에 관계없이 1000원이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보니 화개 못 미쳐 카페 호모루덴스에 불이 켜져 있고, 문이 열려 있었다. ‘오랫동안 카페 문을 열지 않더니 사장님이 오셨나’ 싶어 카페로 전화를 하니 사모님이 받으셨다. “불이 켜져 있어 반가워 전화를 했다”고 하니, “몸은 좀 어떠세요?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 크게 났다는 이야기 들었습니다”라고 여쭈셨다. 필자는 “괜찮습니다. 염려해 주시어 감사합니다. 그러잖아도 지금 병원에 가는 길입니다”라고 말했다.
오늘이 구례장날이다. 3주간 입원해 있다 보니 오랜만에 가보는 구례장이다. 목도 많이 아파 허리를 펴듯 오른손으로 목을 감싸고 한 번씩 들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봄이 시작되는 철이라 장에는 사람들로 붐볐다. 역시 달래·취·민들레·쑥부쟁이·쑥·미나리·방풍 등 봄나물이 많이 나와 있었다. 봄꽃을 파는 꽃가게 앞에도 꽃을 사려는 아주머니들로 시끄러웠다. 필자도 자그마한 카네이션 화분과 노랗게 꽃이 핀 수선화 등 몇 종류의 꽃 가격을 물어만 보고 사지는 않았다.
묘목을 파는 곳이 댓 군데는 넘는 것 같았다. 두리번거리니 “어르신 금송 싸게 줄 테니 가져 가세요”라며, 필자보다도 나이가 많아 보이는 아저씨가 말했다. 스틱을 짚은 채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하고 약간 구부린 형상에 모자를 쓴 데다 마스크까지 착용하고 있어 필자를 할아버지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미안했다. 대봉감과 복숭아 묘목을 각각 하나씩 샀다. 지난 해 봄에 대봉감 묘목 두 개를 구입해 집에 심었는데, 죽었는지 살았는지 나무에 싹도 올라오지 않고 있다. 생강이 비쌌지만 조금 더 샀다.
병원에 가 물리치료를 받을 요량으로 구례에 왔는데 허리와 목이 너무 아파 걸음을 더 걸을 수 없었다. 장터에 있는 정자에 앉아 일단 쉬었다. 눕고 싶었지만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허리도 다 펴지 못해 구부정한 데다 목까지 바로 들지를 못해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장터 축협마트 앞의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도로가의 정류장 부스엔 할머니들로 꽉 차 있어 그 옆에 염치불구하고 “아이고 허리야”라는 소리를 절로 내며 앉아 등을 기댔다. 현재 시간 낮12시 30분이며, 화개로 가는 버스는 오후 2시30분에 있었다. 5분 전에 막 화개행 버스가 출발했던 것이다. “젊은 사람이 그렇다”고, 남들이 흉을 보더라도 버스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벽에 기대어 2시간가량 앉아있는 동안 신기한 사실을 발견했다. 농어촌버스는 인근에 있는 구례시외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해 첫 정류장인 이곳 구례오일장까지는 2, 3분가량 걸린다. 구례군의 각 지역 골짜기로 가는 버스들이 간격을 두고 이 정류장에 도착했다. 각 목적지로 가는 버스가 오면 거짓말같이 할머니들이 한 분도 남김없이 그 버스를 타고 가셨다. 그러다 20, 30분 뒤 다른 목적지로 가는 버스가 도착하기 불과 몇 분 전에 할머니들이 또 한 사람 두 사람씩 정류장에 집결하셨다. 그리곤 해당 버스가 오면 또 바람처럼 모두 타고 사라지셨다. 정류장 부스에 앉을 자리가 없어 필자 옆에 “아이고 다리야”하시면서 할머니 서너 분이 앉아 몇 분 지나지 않아 가시려는 지역의 버스가 도착하자 거짓말처럼 버스를 타고 싹 떠나시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제야 ‘아, 나만 버스 시간을 모르지 할머니들은 모두 자신들이 갈 지역의 버스 시간표를 모두 알고 계시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화개행 버스가 와 타려고 하자 언제 와 있었는지 앞집의 죽계 선생님이 내 앞에 보여 인사를 했다.
버스가 섬진강을 낀 도로를 따라 화개방향으로 가는 도중에 죽계 선생님이 “불일폭포쪽에 산불이 났다”며, 지인이 보내온 사진을 스마트폰으로 보여주었다. 화개 쪽으로 오니 119헬기가 섬진강에서 물을 퍼 올리는 장면이 보였다. 죽계 선생님은 화개에 볼일이 있다며 내리고 버스는 가탄마을 방향으로 향했다. 버스는 가탄마을과 정금마을을 지나 쌍계사 앞으로 나와 목압마을에 정차하자 내렸다. 한 번 앉으면 허리가 아파 일어서는 게 힘들었다.
집으로 와 장에서 사온 생강을 텃밭에 심었다. 그런데 갑자기 농협에 갈일이 생겼다. 다시 목압마을 버스정류장 부스로 나가 기다렸다가 버스를 타고 화개농협에 가서 일을 본 후 걸어서 카페 호모루덴스에 갔다. 오랜만에 사장님을 볼 생각이었다. 사장님은 안 계시고 사모님만 일을 하고 계셨다. 커피를 한 잔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집으로 왔다.
집에 와 차를 우려 마시는데 충북대 철학교수를 지내시다 시골로 들어가 농사를 지으시는 윤구병 선생님의 책 『잡초는 없다』(보리, 1998)가 책꽂이에서 삐져나와 있어 오랜만에 다시 펴 읽고 있는데, 바깥에 사람소리가 들려 나가보니 대비마을에 사는 분의 식구들이 놀러왔다. 최근에 둘째 아들을 낳은 경기도 포천 거주의 딸과 사위도 함께 왔다. 차를 마시며 역시 이야기를 나누며 놀다 둘째 손자가 배가 고픈지 자꾸 보채자 모두 일어섰다. 집안에 아기 소리도 나니 사람 사는 집 같았다.
아직 몸이 완쾌된 것은 아니지만 병원 신세를 지다 퇴원해 보니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시골버스를 타고 비록 병원에는 가지 못했지만 오일장에 다녀온 것, 그리고 몇 달 만에 문을 연 카페 호모루덴스에 들린 것 등의 평범한 생활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한 일이라는 걸 심각하게 깨달았다. 그러면서 가진 것 없지만 더 베풀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에게는 참으로 의미 있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 하루였다.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박사 massj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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