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보는 사람 이야기 (37)‘8진사5대과’를 배출한 풍산 김씨 김대현

조해훈 승인 2020.04.09 12:31 | 최종 수정 2020.04.09 12:44 의견 0
'제좌명적도(帝座冥籍圖)'로, 김창조의 부친이 꿈에 나타나 명적(冥籍)에 미리 정해진 그의 성품과 운명을 예시하였다는 고사를 그린 것이다. 출처: 풍산김씨세전서화첩

요즘 세계적인 코로나19사태로 사람들이 모두 우울해 하고 있다. 상황이 그러하니 이번 글에서는 좀 밝은 이야기로 독자들을 만나려고 한다.

다름 아니라 조선 중기 때 산음현감을 역임한 유연당 김대현(1553~16025)의 여덟 아들이 모두 급제를 하고 그중 다섯 명은 문과에 급제한 내용이다. 과거에 급제한 것이 “좋다”라고 하는 데는 이론이 있지만, 조선시대에 과거 급제는 선비들의 숙명이라고 할 수 있다. 얼마 전까지 존속하였던 현대의 사법고시보다 대과라고 불리는 문과급제의 의미가 더 컸다고 볼 수도 있다. 문과급제를 한다는 것은 한 가문을 일으키고 후세에도 영향을 미치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8진사5대과’ 내용을 이미 알고 있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 내막을 한 번 알아보겠다.

경북 안동시 풍산읍 오미동에 가면 풍산김씨 집성촌이 있다. 김대현의 아들 8형제가 모두 진사시에 합격하고, 그중 5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자 인조가 8송이의 연꽃과 5그루의 계수나무, 즉 ‘8련5계(八蓮五桂)’라고 하면서 ‘오미(五美)’라는 마을 이름을 내렸던 것이다. 이러한 경사는 아마 우리나라 역사를 통틀어서 아주 드문 사례이다.

먼저 이들 8형제가 누구인지 살펴보겠다. 장남은 학호 김봉조(1572~1630)이고, 둘째는 망와 김영조(1577~1648), 셋째는 장암 김창조(1581~1637), 넷째는 심곡 김경조(1583~1645), 다섯째는 광록 김연조(1585~1613), 여섯째는 학사 김응조(1587~1667), 일곱째는 학음 김염조(1589~1652), 아홉째는 설송 김숭조(1598~1632)이다.

여덟째 김술조가 있었으나 그는 17세 때 낙동강에서 물놀이를 하다 익사하였다. 그래서 원래 9형제였으나 한 명이 요절하여 8형제가 된 것인데 이들 모두 급제하여 집안을 빛낸 것이다. 그 중 첫째 봉조, 둘째 영조, 다섯째 연조, 여섯째 응조, 아홉째 숭조 다섯 형제가 문과에 급제한 것이다. 이때부터 이 집안은 일약 명문세족의 기반을 다지게 된다.

조선시대에 사대부 집안이라도 한 집에 한 명도 급제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이처럼 8형제 모두 급제한 데는 개개인의 타고난 머리와 노력, 그리고 각자의 운과 집안의 좋은 기운(大運) 등이 서로 맞물려 작용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8형제 중 첫째인 김봉조의 문집인 『학호문집』.- 아홉째인 김숭조의 『설송문집』.
8형제 중 첫째인 김봉조의 문집인 『학호문집』(왼쪽)과 아홉째인 김숭조의 『설송문집』.

그러면 대체 이 집안은 어떤 가문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풍산김씨 시조는 김문적이다. 그는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은열의 후손으로, 고려 고종 때 나라에 공을 세워 좌리공신에 책록되고 풍산백(豊山伯)에 봉군되었다. 김문적의 손자인 4세손 김연성이 충렬왕 때 문과에 올라 찬성사를 지내고, 안동 풍산 오릉동(현 풍산읍 오미동)에 별장을 두었다.

김연성의 현손으로 병조판서를 지내던 김자양이 왕자의 난에 연루되어 죽자 그의 동생 김자순이 화를 피하여 선대의 별장이 있는 안동으로 내려와 오미동에 정착하고 은거하였다. 김자순의 손자 진산군수 김휘손과 증손자 대사헌 허백당 김양진(1467~1535)은 벼슬살이를 위해 다시 상경하여 한양에 살면서 자주 오미동을 내왕하였다. 김양진의 아들 유경당 김의정은 1516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을 지내고 1545년에 종부시첨정이 되었으나, 그해 7월 인종이 갑자기 승하하자 병을 핑계대고 낙향하여 스스로 호를 잠암이라 고치고 아들 이름도 김농으로 작명하여 오미동에서 지냈다. 이때부터 풍산 김씨의 오미동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린 것이다. 김대현은 김의정의 손자이다.

8형제 중 익산군수·사헌부지평·제용감정 등의 벼슬을 지낸 첫째 김봉조는 『학호문집』(3권2책)을, 이조참판을 지낸 둘째 김영조는 『망와문집』(6권4책), 청암도찰방을 지낸 셋째 김창조는 『장암문집』(6권3책), 넷째 김경조는 이산현감을 지냈으며, 권지승문원부정자를 지낸 다섯째 김연조는 『광록문집』(2권1책), 지평·예조참의·공조참의을 지낸 여섯째 김응조는 『학사문집』(9권6책), 승정원주서·춘추관기주관을 지낸 아홉째 김숭조는 『설송문집』(2권1책)을 남겼다. 8형제 모두 벼슬을 하고, 6명이 문집을 남긴 것이다. 특히 첫째와 둘째는 문예에 조예가 깊어 영남에서 문명을 떨쳤다. 형제의 아버지인 김대현 역시 문집(『유연당문집』·4권2책)을 남겼다.

경북 안동시 풍산읍 오미동에 있는 학암고택으로, 항일애국지사 김재봉 선생의 생가이다.
경북 안동시 풍산읍 오미동에 있는 학암고택으로, 항일애국지사 김재봉 선생의 생가이다.

오미동의 풍산김씨는 대대로 학문과 벼슬이 이어졌고, 일제에 항거하여 일본 왕궁에 폭탄을 투척하고 감옥에서 생애를 마친 의사 김지섭을 비롯하여 독립운동사에 길이 이름을 남긴 김만수·김순흠·김재봉 등 독립운동가도 배출하였다.

한편 이 문중에는 『세전서화첩』이라는 유명한 서화첩이 전해온다. 이 서화첩은 풍산김씨 10세부터 20세에 해당하는 19명의 인물들의 화첩과 해제가 들어있다. 서화첩의 편찬자는 8형제 중 넷째 김경조의 후손인 김중휴이다. 서화첩은 풍산 김시 오미동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2000년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하였다.

<참고자료>

- 김미영·박정혜(2012), 『세전서화첩』, 민속원.
- 네이버 지식백과, <풍산김씨(豊山金氏)>,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서주석(2001), 『안동문화산책』, 이화문화출판사.
- 송지향(1983), 『안동향토지』, 대성문화사.
- 배영동(2005), 「안동 오미마을 풍산김씨 『世傳書畵帖』으로 본 문중과 조상에 대한 의식」, 『한국민속학』 42, 한국민속학회.
- 송만오(2005), 「풍산김씨 문과 인맥도」, 전주대학교, 한국연구재단(NRF).
- 최은주(2016), 「『豊山金氏世傳書畵帖』의 구성과 金重休의 편찬의식」, 『퇴계학과 유교문화』 58,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박사 massj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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