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모든 일이 다 그렇지만 차 농사를 짓는 것은 종교적인 행사처럼 엄숙하다고 생각한다. 그제와 어제 이틀간 혼자서 찻잎을 딴 게 400g가량 되었다. 며칠 전 하동읍내에 갔다 오며 시골버스 안에서 할머니들 간의 대화내용을 들으니, 한 할머니께서 “어제 찻잎 1kg 300g을 땄다”고 하셨다. 아마 필자는 죽었다 깨어난대도 그만큼의 양을 채취하지 못한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남들이 보면 속이 뒤집어질 만큼 필자의 동작이 느리다는 것이다. 둘째는 필자의 차밭은 산의 맨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깔개를 깔고 앉아서 찻잎을 따는 밭차와는 비교 자체가 안 된다는 것이다. 셋째는 해마다 기계로 가지런하게 머리 깎듯 웃자란 부분을 정리하고 비료 등으로 거름을 해주어 새순이 쑥쑥 올라오는 차밭과는 수확할 수 있는 찻잎의 양이 다르다는 것이다. 넷째는 혹여나 차의 새순이 다칠까봐 조심조심 하나씩 따는 필자와는 달리 손으로 쓸어담듯 찻잎을 훑는 할머니들과는 수확량이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 등이다.
필자가 화개 목압마을에 들어와 4년간 차 농사를 지으며 하루치 수확량을 따지자면 이번이 가장 많다. 목압마을에 비해 아래 지역에 속하는 악양면이나 화개면 부춘마을쪽에서는 3월 말부터 찻잎을 땄다는 이야기를 면사무소 직원으로부터 들었다. 목압서사 뒤의 목압산 위쪽의 필자 차산을 다 헤매 이제 처음으로 딴 것이니, 20일 가까이 수확시기의 차이가 났다. 대개는 상대적으로 일주일 정도 늦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최근에 날씨의 변덕이 심해 찻잎 뿐 아니라 고사리도 거의 올라오지 않는다.
요즘 차밭에 드문드문 나는 고사리를 채취하고, 차산의 억새와 가시 등을 낫으로 제거하는 일을 계속 하니 손가락의 마디가 갈수록 굵어지는 걸 본다. 게다가 햇빛 속에 일을 하여 얼굴에 기미와 반점이 눈에 뜨일 정도로 늘었다. 그리고 가시에 긁히고 바위에 무릎이 부딪히고, 벌에 이마와 오른쪽 귀 밑이 쏘이고, 장화를 신은 오른쪽 발바닥이 날카로운 무언가에 찔려 상처가 나 걷기가 불편한 것 등 문제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또한 어제는 경사가 심한 곳에서 찻잎을 따느라 두 번이나 미끄러지면서 아래로 뒹굴기도 하였다. 게다가 연이틀 산돼지도 만나지 않았던가.
사실 첫 찻잎을 딸 때는 먼저 나무에 삼배를 하고 시작한다. “올해도 좋은 찻잎을 내려 주시어 감사합니다. 좋은 찻잎으로 맛있는 차를 많이 만들게 해주십시오.”라는 기도를 하는 것이다.
찻잎을 딸 때 산약초보다 진하고 쓴듯하면서 향기로운 냄새가 난다. 찻잎의 이 냄새를 맡으면 피로를 잊고 행복감에 빠진다. 밭차에서는 이런 산의 정기와 차나무의 강한 생명력과 성분이 응어리진 냄새를 맡을 수가 없다고 한다.
차를 만들 때는 또 어떤가. 차를 덖을 때와 비빌 때는 더 향긋하고 고소하기까지 한 냄새가 난다. 그리하여 차를 덖을 때는 그 공간 밖에서도 차의 향긋한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이다.
차농사를 짓는 일은 아주 신성한 작업이다. 차나무도 생물이기에 잘 도닥거리고 어루만져주면서 상처받지 않도록 해주면 보다 성분이 좋은 찻잎을 선물해준다. 따라서 지나친 욕심이나 장사치의 마음으로 찻잎을 따고 만들어서는 차 맛이 감소될 수밖에 없다. 순수하고 진정한 마음으로 차를 대하여야 더욱 사람에게 이로운 내용물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차는 자신의 주인이 어떤 심성으로 대하는가를 안다. 찻잎을 덖어 비빌 때 손에서 나는 차의 향을 맡아보면 한 해 전보다 차를 대하는 자신의 마음가짐이 더 진지해졌는지, 아니면 더 무심해졌는지를 무심결에 깨닫게 된다.
그래서 ‘차 농사를 짓고 차를 만드는 사람이 차를 속이는 것이지, 차는 절대 사람을 속이지 않고 정직하다’는 사실을 진리처럼 느낀다는 것이다. 여기에도 조건이 있다. “정녕 진정으로 차를 대하는가”, 아니면 “차를 만들어 비싸게 팔 생각만 하는가”라는 구분에 따라 차가 사람에게 주는 향과 맛이 다르다. 차를 구입하여 마시는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알 수 없다. 차를 만드는 사람은 이러한 경구를 알지만, 대부분 무시한다. 차는 하나의 상품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대충 많이 만들어 판매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차를 어릴 때부터 마셔오고, 오랫동안 차나무를 키워 차를 만들어오고, 차인들을 만나온 필자는 “차는 인간이 미처 생각하지 못할 만치 신성하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다. 오래 전에 실크로드와 티베트 등을 여행할 때 유목민들과 고산족들이 그러하였다. 그들은 “차는 우리들의 목숨줄이다”라고 말하였다. 양고기를 주식으로 하는 데다 야채를 먹을 수 없는 그들로서는 차를 통하여 비타민을 얻고, 육류섭취에서 오는 각종 질병을 막아주기 때문에 차를 마시지 못하면 자신들은 죽는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소중하고 고귀하게 여기는 대상이 다르다. 돈이나 권력일 수가 있고,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필자는 차를 통해 이미 불이 꺼져 적막해진 인간 감성의 깊은 면을 느끼며, 혼자만이 감상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관심이 없거나 지나쳐버리는 것을 내 속에 받아들이기 위해 깜깜한 밤에 등불을 켜듯 차의 얼굴 생김새와 표정을 읽는다. 마치 초능력을 가진 외계인이 지구인이 맡을 수 없는 후각으로 예민하게 냄새를 맡고 반응을 하듯이 말이다.
교통사고로 허리가 아파 제대로 펴지 못하고 애를 먹고 있는 필자가 힘들더라도 올해는 지난해보다 더 맛있고 좋은 성분이 함유된 차를 만들 생각이다. 그리하여 지인들과 필자의 집인 목압서사를 찾는 여러 사람들과 나눠 음미할 것이다. 그들도 차의 깊은 맛은 물론 인간을 한없이 사랑하는 차의 천성을 스스로 이해할 수 있도록 말이다.
오늘 2020년 4월 17일, 어젯밤에 만든 첫 햇차로 조상님들과 어머니께 상을 차려 헌다를 하였다. 지난해 봄에는 첫 차를 만들어 부산의 여동생네에 계신 어머니를 찾아가 함께 차를 마셨는데, 같은 해 10월 14일 새벽 2시 33분에 별세하시어 원통하게도 올해 햇차는 맛보시지 못하셨다. 예로부터 첫 차를 만들면 조상님들께 먼저 차를 올리는 게 전통적인 의식이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박사 massj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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