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6일(음력 4월 24일)은 필자의 환갑일이다. 마침 그 전날 필자의 부산대동고등학교 3학년 2반 때 같은 반 친구인 L(친구 사이라 해도 요즘은 개인 이름을 직접 쓰는 게 결례라고 함)이 부인과 함께 1박2일로 놀러오겠다고 연락이 왔다. 차산에서 찻잎을 따다 전화를 받았다. 지난 해 여름에 반 친구 10여 명이 필자의 집 앞에 있는 펜션에 방을 잡고 하루 놀다간 적이 있다. 그 때도 L은 부인과 함께 왔다. 부산에서 부인과 함께 개인사업체를 운영하며, 틈 날 때마다 부인을 동반해 여행을 다니는 L은 그 외에도 두 세 차례 다녀갔다. 필자로서는 여간 반갑고 고마운 일이 아니다. 지리산 깊은 골짜기인 화개동까지 일부러 찾아와주니 말이다.
컨디션이 좋지 않기도 했고, 친구가 온다니 기다려지기도 해 오늘 차산에 올라가지 않았다. 중간에 연락이 왔는데 인천에 사는 반 친구인 P부부도 함께 온다는 것이었다. 한국철도공사(KORAIL)에 근무하는 친구다. P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아침마다 좋은 글귀와 동영상을 보내준다. 참으로 부지런하고 대단한 친구라고 평소에 생각하고 있다.
남자가 살면서 가장 편한 벗이 고등학교 때 친구라는 한국 사회의 정리에 대해 잠시 생각해 봤다. 『논어』 「학이(學而)」편에서 이를 두고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라고 했다. ‘벗이 멀리서 찾아주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뜻이다. 여기서 벗(朋)은 함께 동문수학한 사이임을 뜻하니, 이 친구들은 당연히 그런 셈이다.
오후 5시 무렵 L부부와 P부부가 필자의 집 앞에 있는 펜션에 도착했다. 너무 반가웠다. 오자마자 L은 화개동천에 내려가고, P부부는 필자의 집에 와 녹차를 함께 마셨다. 필자가 며칠 전 만든 녹차였다. P는 지난해에도 이곳에 왔지만 그의 부인은 처음이었다.
펜션에서 L부부가 준비해온 삼겹살을 구워 저녁을 먹었다. 올해 친구 둘 다 환갑이지만, 아마 필자가 몇 달 빨랐는지 모른다. 여하튼 이들이 오면서 봉하마을에 들러 샀다는 찰보리빵을 케이크처럼 쌓아 노래를 부르며 축하를 해주었다. 필자는 어제 저녁 구례에 가 친구가 오면 함께 마시려고 와인을 한 병 사 두었다. 그리고 집 행사 때 쓰고 남은 소주와 맥주를 함께 테이블에 올려놓고 겸사겸사 축하를 하며 술잔을 채워 “위하여”를 외쳤다. 친구들도 자리를 하는 내내 환갑의 의미와 요즘의 추세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L부부의 러브스토리를 들었다. L과 그의 아내는 각각 21살과 20살에 만나 어렵게 7년 동안 연애를 해 결혼에 성공했다고 했다. 현재 손주가 두 명이나 있는 이들 부부의 연애담은 말 그대로 순애보였다. 부인은 친정 식구들이 한사코 반대했지만 L이 군대 가 있는 3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편지를 보냈고, 각종 물품도 사 보내며 뒷바라지를 했다고 했다.
L은 아직 술·담배를 하지만, P는 “지난해 목 수술을 한 뒤부터 술·담배를 끊었다”고 했다. 필자도 술·담배를 하지 않는다. 그렇게 늦게까지 놀다가 헤어지고, 친구 부부들은 나란히 있는 206호와 207호로 들어갔다. 내일 아침은 오전 8시에 같은 자리에서 라면을 끓여 햇반을 먹기로 했다. 요즘 몸이 좋지 않은 필자는 집에 들어오자 피곤해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만60년 만에 찾아온 필자의 환갑일은 그렇게 지나갔다.
다음 날 아침에 라면 끓일 때 넣을 만두를 냉장고에서 꺼내 갖고 펜션에 갔다. 라면과 햇반으로 맛있게 아침을 먹은 후 친구들 부부는 필자의 차산에 함께 가 고사리를 뜯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산에 올라가는 입구에서 부인들은 “못 가겠다”고 했다. 풀이 우거지고 길이 험해 보이자 그랬던 것 같다. 필자의 차산은 초입부터 급경사이고, 혼자 다니는 좁은 오솔길이며, 미끄러지기 일쑤다.
방향을 바꾸어 바로 인근의 쌍계사로 갔다. 필자는 친구들에게 고운 최치원의 진각선사탑비(국보 제47호)에 대한 설명을 해주곤, 대웅전 뒤의 화엄전으로 안내를 했다. 쌍계사는 우리나라 사찰 중에서 해인사 다음으로 불경 목판이 많이 보관돼 있다. 화엄전에 모셔져 있는 불상 좌우 옆과 뒷공간에 그 경판들이 옆으로 꽂힌 게 아니라 빼곡하게 쌓여 있다. 몇 달 전에 이 사찰의 박물관장스님과 화엄전의 경판 보관공간에 들어가 보니 먼지투성이고, 판목을 벌레가 갉아먹어 많이 훼손돼 있었다. 친구들과 화엄전 오른쪽으로 해서 뒤를 돌아 왼쪽 벽 위로 보라고 했다. 경판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것을 본 친구들은 “아, 저기 보이네”라며, 신기해했다.
그런 다음 금당(金堂)으로 올라갔다. 금당은 하안거와 동안거 기간에는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지만 지금은 그 기간이 아니라 허용된다. 돈오문으로 들어가 청학루 앞을 지나 계단을 오른 후 금당 앞에 서자 필자는 “금당 좌우의 글씨가 추사 김정희가 쓴 것”이라며, “그가 이곳에서 차를 만들며 수행하던 만허 스님의 차를 얻어 마시곤 저 글씨를 써준 것”이라는 설명을 했다. 그리곤 추사의 부친인 김노경이 경상도관찰사 시절 둘째 아들인 김명희를 데리고 이 화개동에 와 신흥사(현 화개초등학교 왕성분교) 앞 계곡에 있는 각석 ‘세이암’을 구경한 후 옆 바위에 이름을 새긴 이야기 등을 해주었다. 그리고 금당 안에 혜능선사 두상 위에 세워져 있는 석탑이 옛 목압사 터(현 필자의 집 일대)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설명도 곁들였다. 필자의 느린 말투를 친구들은 알고 있으니 괜찮겠지만, 아마 그 부인들은 답답해 속이 터졌을지도 모른다.
쌍계사에서 나와 화개장터로 갔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면사무소 옆 조영남갤러리로 들어갔다. 갤러리 건물 사이에 있는 탑을 본 후 전시된 조영남의 작품들을 구경했다. 그런 후 옛날국밥집에 가 섬진강 재첩국을 시켜 먹었다. 식당의 사장님이 밥이 나오기 전에 직접 만든 발효차를 주셨다. P가 “우리 친구 조 시인 덕분에 맛있는 발효차도 얻어 마신다”고 인사를 했다. 필자와 사장님과는 아는 사이이다. 사장님이 직접 채취해온 고사리나물과 죽순나물, 고추장으로 무친 가죽나물 등이 반찬이었다. 모두 맛있다고 반찬을 더 달라고 해 먹었다. 점심을 먹은 후 필자가 나물과 야채를 좋아하는 L의 부인에게 “취나물이 싸고 좋으니 좀 사가시라”고 했다. L의 부인은 장터 안으로 들어가 5000원어치를 샀다.
P부부가 구례구역에서 낮12시 40분에 출발하는 기차를 타야만 해 역으로 이동했다. 구례로 가 섬진강 다리를 건너 순천시 황전면 초입에 있는 구례구역에 갔다. 역을 배경으로 단체 사진을 찍은 후 P부부는 떠났다.
필자가 L부부에게 “굶어죽는 사람이 없도록 늘 뒤주에 쌀을 넣어둬 이웃 사람들에게 나눠준 운조루에 가볼까?”라고 권했다. 운조루 입구에서 집 주인인 할머니에게 1인당 입장료 1천 원씩 주고 들어가 구경했다. 다행히도 관청에서 집에 예산을 많이 투자를 하지 않아서인지 원형이 대부분 보존돼 있다. 대학 때부터 여러 차례 와봤던 집이다.
운조루에서 나와 화개로 오면서 필자는 “헤어지기 섭섭하니 커피나 한 잔 하자”고 해 호모루덴스 카페에 가 화개동천을 보면서 커피를 마셨다. 계곡 건너편에 하동군에서 지은 관청 건물들이 주변 환경과 어울리지 않게 사각 콘크리트 건물로 영 볼썽사나웠다. 또한 계곡 변에 일직선으로 돌을 쭉 쌓아 정비한 모습 역시 보기에 좋지 않았다. 계곡의 큰 돌들도 사라져 물이 바위에 부딪히며 나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밋밋했다. L부부 역시 마찬가지의 느낌이었던 모양이다.
커피점에서 나와 L부부는 필자가 사는 목압마을 입구의 다리 앞에 내려다 주곤 부산으로 향했다. 논어에 나오는 의미를 가진 벗들과 1박2일을 함께 한 후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손을 수차례 흔들며 헤어졌다.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박사 massj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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