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 명나라는 두 번이나 조선에 원병을 보냈다. 명군이 참전한 이유와 그들이 보인 행태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결론적으로는 실망스러웠다. 여하튼 1593년 10월에 선조와 광해군은 서울로 돌아왔다. 그해 윤달 11월 19일, 광해군은 다시 서울을 떠나 전라도와 충정도 일대를 돌며 병력을 모집하여 훈련시키고 군량을 수집하여 명군에게 공급토록 하였다. 그는 이듬해인 1594년 8월 25일 서울로 귀환하였다.
조선 조정은 왜란 시기부터 광해군을 왕세자로 승인해달라고 명 조정에 계속 요청했지만, 명은 광해군이 맏아들이 아닌 둘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하였다. 그 와중에 선조는 1602년에 당시 광해군보다 아홉 살이나 어린 처녀에게 다시 장가갔다. 이후 광해군과 악연이 이어진 인목대비였다. 인목대비는 1606년 봄에 선조의 적자인 왕자 영창군을 낳았다. 하지만 선조는 이듬해인 1607년 3월 3일 병석에 누워 그 이듬해인 1608년 2월 1일 세상을 떠났다. 광해군은 선조가 죽은 그 다음 날 오늘날의 덕수궁(당시 정릉동 행궁)의 서청에서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1592년 4월 왕세자로 지명된 지 16년만의 일이었다. 그 세월은 전쟁의 발발과 종식, 부왕 선조와의 갈등, 명 조정과의 줄다리기 등으로 점철된 그야말로 전전긍긍의 시간이었다. 그때 인목대비는 25세, 광해군은 34세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왕세자 시절 그를 도왔던 대북파의 수장이었던 정인홍과 이이첨은 유배에서 풀려났다. 남명 조식의 수제자였던 정인홍은 누가 뭐라 해도 광해군에게 최고의 공신이었다. 왕세자 광해군이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건 상소를 올려 그를 ‘구원’하려 했을 만큼 충성심이 컸던 것이다. 광해군은 즉위 직후 당파를 불문하고 어진 인재만을 거두어 시대의 어려움을 헤쳐 나가겠다고 의지를 피력하고 이를 실천으로 옮겼다. 최고 관직인 영의정에 남인인 이원익을 임명하였다. 광해군은 이항복과 이덕형도 중용하여 즉위 초반에는 이들 세 사람이 번갈아가며 정승직을 주고받았다.
광해군은 피폐해진 민심을 해결하기 위하여 즉위 직후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1608년 5월 경기도 지역에 대동법을 전격적으로 시행하였다. 공물을 현물로 걷는 대신 봄·가을에 쌀 16말만 내도록 하고 여타의 비용은 완전히 없앴다. 경기도 백성들의 반응은 매우 컸다. 또한 광해군은 즉위 직후부터 전란 중에 흩어져 버린 서적들을 수습하고 새로 찍어내는 데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각종 사료와 새로 찍어내거나 사신들 편으로 구입해온 서적을 보관하는 데도 각별한 신경을 썼다. 무주의 적상산 사고를 짓는 등 전란 등에 훼손된 사고에 대한 정비 작업을 벌였다. 광해군 대에 새로 찍어낸 많은 서적들 가운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동의보감』(1613년 간행)과 『동국신속삼강행실도』(1617년 〃)였다. 동의보감은 굶주림과 전염병 때문에 인구가 줄어들고 있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하여,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전란 이후 흐트러진 민심과 기강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에서였다.
하지만 김직재의 역모사건과 문경새재에서의 은상 살해 사건인 계축옥사 등으로 광해군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그렇지만 역모와 관련하여 공격의 표적이 여덟 살밖에 되지 않았던 영창군으로 옮겨갔다. 수사과정에서 영창군이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주장이 나와 대북파들을 중심으로 ‘역적’ 영창군을 처단하라는 요청이 빗발쳤다. 광해군은 동생인 영창군을 죽이라는 요구에 쉽게 따를 수 없었다. 영창군은 결국 서인(庶人)으로 신분이 강등되어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되었는데, 유배 직후 강화부사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이로 말미암아 아들을 잃은 인목대비는 광해군에 대한 원한을 증폭시켰다. 대북파는 인목대비도 공격하였다. 대북파에 의해 인목대비의 폐모 논의가 시작된 것이다. 이미 서인과 남인들 대부분이 ‘역모’ 가담자로 몰려 제거된 상황이었다.
나중에 광해군이 인조반정(1623년)을 통해 쫓겨나고 이후 ‘폭군’ 혹은 ‘혼주’로 불리게 된 원인 가운데 중요한 것이 바로 토목공사와 관련된 것이다.
광해군은 즉위하자 왜란 당시 불타버린 종묘의 중건을 마쳤고, 부왕 선조가 시작한 창덕궁 중건 사업을 재개하여 1611년 완성한 후 창덕궁으로 옮겨갔다. 창덕궁 중건을 마친 뒤에는 다시 창경궁을 중수하는가 하면, 돈의문 안에 경덕궁을 지었다. 뿐만 아니라 정원군(광해군의 이복동생이자 인조의 아버지)의 사저가 있던 인왕산 부근에 인경궁을 지었고, 북학 자리에는 자수궁을 짓는 등 궁궐을 짓는 데 대단한 집착을 보였다.
광해군이 왕권과 왕실의 위엄을 드러내는 사업을 열성적으로 추진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종묘를 추진하고 궁궐 건설에 몰두한 부분이었다. 왕실의 송가집(頌歌集)인 『용비어천가』를 복간해냈던 것도 대표적인 사업이었다.
게다가 1618년(광해군 10)에 명나라는 후금을 치는 데 필요한 원병을 보내라고 요구해 왔다. ‘자신들이 임란 때 베푼 은혜’(재조지은·再造之恩)에 보답하라는 명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광해군은 후금을 치는 원정군을 파견하였던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전장을 누빈 광해군은 그동안 후금과 명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어느 한쪽으로 쏠리는 외교정책을 쓰지 않았다. 그가 조선 시대 어느 왕보다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로 인정을 받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그는 무기를 제작하고 확보하는 데 기울인 노력도 각별하였다. 광해군이 후금에 대하여 기미(羈縻·‘굴레와 고삐’라는 뜻으로, 속박하거나 견제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책을 쓰면서 양국 사이에 평화가 유지되었지만 문제는 간단하지 않았다. 명은 왜란 때 자신들이 조선에 베푼 은혜를 갚으라는 재조지은을 계속 강조하였다. 그것은 후금을 치기 위하여 ‘이이제이(以夷制夷)’, 즉 오랑캐로서 오랑캐를 친다는 전통적인 중국 주변 정책의 일환이었다. 광해군은 명의 요청인 출병을 처음에 거부하였지만, 결국에는 신료들의 요구를 견디지 못하고 강홍립에게 전권을 맡긴 뒤 1만여 명의 군사를 보냈다. 단 피해는 최대한 줄이라고 하였다. 광해군은 여러 가지 이유로 명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것이었다.
강홍립의 조선군은 심하에서 전투를 치렀지만 결국 후금군에게 항복하였다. 그는 후금군에게 억류된 뒤에도 광해군에게 각종 정보를 올려 보냈다. 강홍립이 광해군에게 보낸 정보는 심하전투 이후 광해군이 대명·대후금 정책을 세우는데 기본 자료로 활용되었다. 1619년 11월, 명은 조선에게 1만 명의 병력을 다시 요구하였다. 명의 재징병 요구에 대한 광해군의 태도는 단호하였다. 광해군이 나름의 혜안과 탁월한 외교 수단을 통해 후금과 평화를 유지하고, 명의 재징병을 회피하는데 성공하였으나 그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계속>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박사 massj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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