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보는 사람 이야기 (42)광해군㊦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나 유배지 제주도에서 쓸쓸히 최후 맞아

조해훈 승인 2020.06.17 21:24 | 최종 수정 2020.06.17 21:53 의견 0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릉리에 있는 광해군 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릉리에 있는 광해군 묘.

명나라가 처음 징병을 요구하였지만 광해군이 이를 회피하려 했던 것, 결국 명의 압력과 비변사 신료들의 채근을 이기지 못하고 원병을 보냈던 것, 1619년 조명 연합군이 심하전투에서 패한 것, 이후에도 거듭되었던 명의 재징병 요구를 여러 가지 외교 수단을 통해 끝내 회피한 것 등 일련의 사건들이 내정 전반에 심상치 않은 파장을 몰고 왔다. 그 파장 속에서 인조반정으로 가는 조짐들이 싹을 틔우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심하전투 이후 광해군은 소신 있는 대외 정책을 밀고 나갔지만, 그 대외 정책이 몰고 온 파란을 극복하지 못하였다. 그런 상태에서 왕권의 보위를 위해 여전히 전전긍긍했고, 결국 반정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광해군은 1623년(광해군 15) 3월, 서인 일파가 주도한 무력 쿠데타에 의해 폐위되었다. 사실 광해군 정권을 전복하려는 기도는 1620년경부터 추진되었다.

반정 주체들은 3월 12일 새벽 창덕궁을 기습한 것이었다. 다급한 광해군은 의관 안국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이튿날인 3월 13일, 반정 주체들은 병력을 풀어 광해군의 행방을 쫒았다. 결국 광해군과 그의 아들을 찾아내고 사태를 평정하였다.

이어 덕수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를 뵙고, 그녀의 위호를 서궁에서 대비로 회복시킨 뒤 옥새를 넘겨받아 능양군을 즉위시켰다. 그가 바로 인조였다. 반정이 성공한 다음 날부터 숙청 작업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광해군 대에 정권 실세였던 대북파의 핵심인물들이 저잣거리에서 목이 잘렸다. 정인홍도 고향인 합천에서 잡혀 올라와 처형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여든셋이었다. 저항 한번 번번이 해보지도 못하고 대북파는 거의 전멸되다시피 하였다. 대북파들이 쫓겨나 비어버린 관직은 반정을 주도한 서인들과 그에 묵시적으로 동조했던 남인들이 차지한 것이다. 이들은 이후 조정을 좌지우지하면서 실질적인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였다.

①태백산본 『광해군일기』 1621년 6월 6일조. 태백산본 『광해군일기』의 내용을 가감하고 정서하여 다시 완성한 것이 정족산본 『광해군일기』다. 왼쪽 부분에 “이것이 과연 적과 화친을 하자는 뜻이겠는가(此果和賊之意乎)”라는 구절을 지운 자국이 선명하다.
백산본 『광해군일기』 1621년 6월 6일조. 태백산본 『광해군일기』의 내용을 가감하고 정서하여 다시 완성한 것이 정족산본 『광해군일기』다. 왼쪽 부분에 “이것이 과연 적과 화친을 하자는 뜻이겠는가(此果和賊之意乎)”라는 구절을 지운 자국이 선명하다.

광해군 재위 15년간은 대북파가 정권을 독점하였으며, 이에 불만을 품은 서인 김류·이귀·김자점 등이 인조반정을 일으킨 것이다. 쿠데타를 일으킨 세력은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인 것”, “명의 은혜를 배반한 것” 등을 그 명분으로 내세웠다.

광해군은 성실하고 과단성 있게 정사를 처리했지만,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대북파의 장막에 의해 판단이 흐려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명기(명지대) 교수는 “광해군만큼 열심히 주변 열강의 동향을 살피고 그만큼 기민하게 국제 정세 변화에 대체하려 했던 군주는 일찍이 없었다”고 단정했다.

광해군은 폐위된 직후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에게 원한을 품었던 인목대비가 끝까지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반정 직후 부인 유 씨, 세자 자리에서 폐위된 아들 부부와 함께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강화로 유배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인과 아들 부부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혼자 남은 광해군은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반란군들과 연결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태안으로 옮겨졌다가 난이 진압되자 다시 강화도로 돌아왔다. 그러다 병자호란이 일어났던 1636년 광해군은 교동(喬桐)으로 옮겨졌다가 이듬해인 1637년에는 다시 제주도로 옮겼다.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청 태종에게 항복했던 바로 그해였다. 인조는 청 태종에게 세 번 큰 절을 올리고, 한 번 절할 때마다 이마를 세 번씩 조아리는 가장 치욕적인 항복 의식을 한 것이었다. 인조반정을 일으킨 세력은 정권을 획득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국가를 보위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그들은 명과 후금을 구슬려 전쟁을 막고자 했던 광해군을 ‘패륜아’라고 욕했던 것이다.

광해군은 1641년(인조 19) 7월 1일 폐위된지 18년만인 제주도의 유배지에서 67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부음을 듣고 제주목사 이시방이 들어갔을 때는 계집종이 혼자 염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한때는 왕이었던 광해군의 말로가 너무나 비참한 순간이었다.

광해군의 폐위사건은 왕권과 신권(臣權)과의 경쟁에서 신권이 승리한 결과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역사학계에서는 대체로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되었다고 평가한다.

조선시대에 왕이 아닌 군으로 강등된 인물은 세 사람이었다. 노산군과 연산군, 그리고 광해군이었다. 이 세 사람에게는 ‘~조(祖)’나 ‘~종(宗)’ 대신 ‘~군(君)’이란 칭호가 주어졌다. 하지만 노산군은 후일 단종으로 복위가 되었다. 그가 왕위에 있던 시절의 역사를 기록한 실록도 『단종실록』이라는 정식 명칭을 받았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릉리에 있는 초라한 광해군의 묘 이름은 ‘왕(王)’이 아닌 ‘광해지군묘(光海之君墓)’로 적혀 있다.

광해군대에 편찬한 『선조실록』과 인조반정 후 서인들이 다시 편찬한 『선조수정실록』.
광해군대에 편찬한 『선조실록』과 인조반정 후 서인들이 다시 편찬한 『선조수정실록』

한편 1977년 유네스코는 500여 년에 이르는 장구한 시대의 사실들을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을 세계의 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광해군 대의 기록인 『광해군일기』는 ‘실록’이란 이름을 획득하지는 못하였지만, 엄연히 조선왕조실록에 포함된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광해군일기의 경우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유일하게 중초본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다른 실록은 정서본만 남아 있다. 대개 실록이 완성되면 그것들을 각지에 산재한 사고(史庫)에 보관하는 한편 초초본, 중초본, 정초본 등의 대본들은 물로 씻어내게 된다. 그것을 ‘세초(洗草·초고를 씻어버리는 의미)라고 한다.

인조반정 세력들이 반정의 정당성을 위하여 광해군을 어떻게 대했는지는 중초본과 정서본을 비교함으로써 그 실상을 어느 정도나마 엿볼 수 있다. 그 예를 하나 보자. 인조반정의 주체들이 광해군을 쫒아내는 것을 정당화하면서 내세웠던 명분 가운데 하나가 바로 “광해군이 명나라를 배반하고 오랑캐인 후금과 화친하고자 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광해군이 화친론자가 아님을 적시하는 내용이 중초본인 태백산본 일기에서는 붉은 먹으로 지워져 있는 것이다. 정서하는 과정에서 없애버리기 위함인데, 따라서 정족산본 일기에는 이 내용이 빠져 있다.

만일 중초본 일기가 세초되어 사라지고 정서본만 남아 있었더라면 광해군은 자신이 화친론자가 아니라고 변명(?)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인조반정 이후 거의 전멸해버린 북인들의 행적은 오롯이 승리자인 서인들의 손에 의해 기록되었고, 그들은 서인들이 기록한 자신들의 실록을 다시 검토하거나 수정할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그래서 광해군이 활동했던 시대의 역사적 모습을 서인들의 눈과 평가를 통해 우리는 보아온 것이다. 광해군 대에 『선조실록』이 편찬되었는데, 그 내용에 불만을 품은 서인들이 인조반정 이후에 선조실록을 수정하여 『선조수정실록』이란 이름으로 다시 편찬했다. 이것은 한 사례이지만 권력은 역사를 왜곡하거나 수정하기도 한다.<끝>

조해훈 시인

<참고자료>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한명기(2018), 『광해군』, 역사비평사.
-한명기(2009), 『역사평설 병자호란 1·2』, 푸른역사.
-계승범(2015), 「광해군, 두 개의 상반된 평가」, 『한국사학사학보』.
-임승표(1995), 「『광해군일기』의 편찬경위와 국역과정」, 『민족문화』.
-한명기(1988), 「광해군대의 대북 세력과 정국의 동향」, 『한국사론』 20.
-한명기(1999), 「임진왜란 시기 ‘재조지은(再造之恩)’의 형성과 그 의미」, 『동양학』 29.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박사 massj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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