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살고 있는 경남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목압마을은 고려와 조선시기 ‘청학동’으로 인식된 불일폭포(청학동폭포)로 올라가는 지점에 있다. 마을로 들어오는 목압다리 앞에 남명 조식 선생이 불일폭포에 갔다 쓴 시 <청학동>이 새겨진 시비가 서 있다. 지금도 지리산 10경 중의 하나인 불일폭포로 가는 많은 사람들은 목압마을을 통해 올라간다.
이 폭포에 올라가면 자그마한 암자인 불일암(佛日庵)이 있다. 낭떠러지 위에 있는 이 암자는 신라 시대 진감국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불일암의 주련 중 하나에 ‘羅代眞鑑初始居(나대진감초시거)’라고 적혀 있다. 즉, ‘신라시대의 진감선사가 처음 이곳에 머물기 시작했다’라는 말이다.
고려 시대 때 교종과 선종의 갈등 속에서 선종 결사운동을 주도한 승려로 돈오점수·정혜쌍수로 대표되는 한국 불교 전통의 사상적 기초를 성립한 지눌(1158~1210) 국사가 이 암자에서 수도하였다고 한다. 암자의 이름이 ‘불일암’인 것은 지눌의 호가 불일보조(佛日普照)이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조선시대의 고승인 경암(1743∼1804) 스님의 『경암집』 「불일암기」에 보면 “쌍계사에서 10리 남짓한 곳에 있으며, 고려 중기에 국사였던 목우자의 시호가 불일보조인데 이곳이 국사의 도량임을 신빙할 사적이 없어 가히 슬프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불일보조 지눌이 이 암자에서 수도하였기 때문에 그 호를 따서 불일암이라고 부르지만, 그걸 증명할 자료가 마땅하게 없다는 의미이다.
조선 시대 문신인 청파 이륙(1438∼1498)의 지리산 유람기인 「유지리산록」을 보면 “불일암은 서쪽으로 쌍계사와 십여 리 떨어져 있는데 벼랑과 골짜기가 매우 험준하여 해와 달도 비추지 못하고 다닐 수 있는 길도 없다…”라고 기록돼 있다. 탁영 김일손(1464~1498)의 「두류산기행」, 남명 조식(1501~1572)의 「유두류록」 등에도 불일암이란 이름으로 적혀 있다.
그러면 언제 이 암자가 불일암으로 불리워졌을까? 1210년 지눌이 입적하자 희종은 ‘불일 보조 국사’라는 시호를 내려 지눌은 국사(國師)로 추증되었다. 그래서 다른 이름을 가졌던 이 암자는 그때 이후로 불일암으로 불린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륙이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나 암자에 들렀으니, 당시는 불일암으로 통칭되고 있었다. 그런 점 등을 생각한다면 지눌이 불일암과 어떠한 형태로든 인연이 있었을 것임은 틀림없다.
그러면 25세에 승과에 합격한 지눌이 언제 불일암에서 정진을 하였을까? 지눌은 40세인 1197년 왕족 및 관리를 비롯하여 승려 수백 명과 함께 결사에 참여하여 수도하였는데, 시비를 일으키는 무리가 있었다. 지눌은 이들을 교화하지 못하자 지리산에 있는 상무주암(경남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으로 들어가 홀로 선정을 닦았다고 한다. 그가 불일암에서 수도를 하였다면 아마 이 무렵일 것이다. 불일암과 상무주암은 지리산 벽소령을 넘으면 어렵지 않게 오갈 수 있다.
그러다 1205년(희종 1) 지눌은 새로운 결사도량인 송광사로 가 큰 법회를 열고, 대중을 지도하였다. 10여 년 동안 송광사를 중심으로 새로운 선풍을 일으키다가 53세인 1210년 3월 27일 대중들과 함께 선법당에서 문답한 뒤, 법상에 앉아 입적하였다고 한다.
그는 1207년에 『화엄론절요』와 『육조법보단경』을 간행하였으며, 1209년에는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를 간행하였다. 그리고 지눌은 1205년부터 1210년 사이에 『수심결』과 『원돈성불론』 『간화결의론』의 저술을 남긴다. 이와 같은 일련의 전적 간행과 저술은 삼문(三問)의 지도와 관련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 지눌의 가르침과 수행지도는 깨달음에 계기가 되었던 전적과 직접 찬술했던 각종 저술을 통해서 가능할 수 있었다. 이는 『권수정혜결사문』의 재간행을 포함하여 지눌의 저술이 1205년부터 1210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지눌과 화개동과의 인연은 그의 저술들과도 연관된다. 쌍계사 인근에 있던 신흥사(현 왕성초등학교)에서 지눌이 1209년 종밀의 『법집별행록』을 요약하고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 지은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를 1579년 발간하였다. 또한 쌍계사 말사인 능인암에서 1604년(선조 37)에 지눌의 저술인 『원돈성불론』과 『간화결의론』을 합쳐 『원돈성불론』으로 간행하였다. 지눌이 화엄사상의 대의를 밝힌 책인 원돈성불론과 간화결의론은 당대에 간행되지 못하고 묻혀 있다 그가 입적한 지 5년 후인 1215년(고종 2) 5월에 제자 혜심(1178~1234)이 두 권을 합쳐 『원돈성불론』으로 처음 간행하였다. 이 책의 초간본은 전하지 않고, 앞에서 말한 능인암 개간본이 현전하는 가장 이른 판본이다. 그 이후의 것으로는 1608년의 전남 순천 송광사본 등이 전하고 있다.
이쯤 되면 지눌과 화개동과의 인연은 보통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호를 딴 불일암, 불일암 아래에 있었던 능인암과 신흥사에서 지눌의 저서를 간행하였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그냥 인연이 아니다.
<참고자료>
- 강건기(2010), 『보조국사 지눌의 생애와 사상-불일 보조 스님 이야기』, 불일출판사.
- 강건기 외 지음(2002) 예문동양사상연구원 엮음, 『지눌』, 예문서원.
- 길희성(2001), 『지눌의 선사상』, 소나무.
- 승원(김부용)(2010), 「지눌의 깨달음과 수행」, 『불교사상과 문화』 2,
- 이종익(1989), 「普照著述의 書誌學的 解題」, 보조사상 3, 보조사상연구원.
- 임영숙(1986), 「지눌의 찬술선서와 그 소의전적에 관한 연구」, 서지학연구 1, 서지학회.
- 최성렬(2001), 「보조 지눌의 돈오성불론 분석」, 『범한철학』 24집, 범한철학회.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박사 massj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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