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인연」으로 잘 알려진 피천득(1910~2007) 선생이 “桐千年老恒藏曲/ 梅一生寒不賣香”라는 시구를 좋아했다고 한다. 이 시는 조선시대 4대 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알려진 상촌 신흠(1566~1628)이 편찬한 『야언(野言)』에 나온다.
시 전문은 “桐千年老恒臧曲(동천년로항장곡) / 梅一生寒不賣香(매일생한불매향) / 月到千虧餘本質(월도천휴여본질) / 柳經百別又新枝(유경백별우신지)”이다. 뜻은 “오동나무는 천년을 묵어도 항상 자기 곡조를 간직하고 / 매화는 일생을 춥게 살아도 자기 향기를 팔지 않네. /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본바탕 그대로 남아있고 / 버드나무는 백번 꺾여도 새 가지가 돋아나네.”이다. 신흠은 오동나무·매화·달·버드나무 등 자연을 주제로 지조를 잃지 않고 고고하게 살아가는 선비의 삶을 읊었다.
『야언』은 조선 후기 여러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개선책을 논한 책으로 대략 1834년을 전후한 시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신흠은 조선 중기 한문학의 대가로 『상촌집』 60권이 전하며 시조도 31수나 남겼다. 신흠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그의 시조를 한 수 읽어보자. 시제는 「산촌에 눈이 오니」이다. “산촌(山村)에 눈이 오니 돌길이 묻혔어라 / 시비(柴扉)를 열지 마라 날 찾을 이 뉘 있으리 / 밤중만 일편명월(一片明月)이 긔 벗인가 하노라.”
이 시조를 현대어로 풀이하면 “산마을에 눈이 내리니 골짜기의 돌길이 온통 덮여 버렸구나 / 사립문을 열지 마라 오늘 같은 날, 날 찾을 이가 어디 있겠는가 / 밤하늘에 떠 있는 저 달만이 내 벗이로다”라는 내용이다. 산골짜기에 거처하고 있느니 날씨가 좋아도 찾아올 사람이 많지 않을 텐데, 눈까지 내리는 날에 누가 찾아오겠느냐는 생각을 하는 신흠의 마음이 느껴진다.
신흠은 선조의 신망을 받아 예조참판·병조참판·홍문관부제학·성균관대사성·도승지·예문관제학 등을 지냈다. 그러나 1613년 (광해군 5) 대북파가 영창대군 및 반대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계축옥사를 일으키자 선조로부터 영창대군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7신(遺敎七臣)으로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이어 인목대비의 폐비와 관련하여 춘천에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7년 후 인조가 즉위할 때까지 자연을 벗 삼아 은사(隱士)로 지내며 절개를 지킨다.
그러면 유교칠신은 무엇을 말하며, 어떤 사람들일까? 선조에게는 적자와 서자를 합해 총 14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영창대군은 선조가 55세 때 얻은 유일한 적자이다. 이 때문에 영의정인 소북파의 유영경 등은 한때 영창대군을 왕세자로 추대하려 했고, 이는 광해군 집권 후에 그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와 관련한 여러 사정을 살펴보자. 영창대군은 1606년 4월 12일(음력 3월 6일)에 선조와 인목왕후 사이에서 유일한 적장자로 태어나 1614년 3월 19일(음력 2월 10일)에 강화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던 선조는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세자를 바꿀 계획을 세우기도 했으나 무산되었다. 한편 선조는 죽음을 앞두고 신흠 등 일곱 대신들을 불러 영창대군을 잘 보필해달라고 유언을 하였다. 이들 대신은 신흠 외에 박동량(朴東亮)·서성(徐渻)·유영경(柳永慶)·한응인(韓應寅)·한준겸(韓浚謙)·허성(許筬)이었다. 영의정을 지낸 유영경은 소북파의 영수로 이이첨과 맞섰던 인물이고, 허성은 허균의 큰형으로 이름난 문장가이자 성리학자였다.
계축옥사가 일어나 대북 일파는 박응서 등에게 영창대군 추대 음모를 거짓으로 자백하게 하고 외할아버지 김제남이 반역죄로 사사되었으며, 영창대군도 폐서인(廢庶人·벼슬이나 신분적 특권을 빼앗아 서민이 되게 함)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1614년 이이첨 일파가 강화부사 정항을 시켜 악의적으로 영창대군의 방에 뜨겁게 불을 때 죽게 하였다고 한다. 이때 영창대군의 나이 9세였다.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정항이 영창대군을 굶겨서 죽게 하였다거나 정항이 온돌을 뜨겁게 달구어 영창대군을 증살(蒸殺·열로 쪄 죽임)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인조실록』에 따르면, 광해군의 밀명을 받은 별장(別將) 이정표가 음식물에 잿물을 넣어 영창대군을 죽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양자 사이에 논란이 있다.
여하튼 파직되고 유배를 사는 등 10여 년 남짓한 기간을 보낸 신흠은 1623년 3월 인조의 즉위와 함께 이조판서 겸 예문관·홍문관의 대제학에 중용되었다. 같은 해 7월에 우의정에 발탁되었으며,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좌의정으로서 세자를 수행하고 전주로 피난했다. 같은 해 9월 영의정에 오른 후 죽었다.
신흠은 사림의 신망을 받음은 물론 이정구·장유·이식과 함께 조선 중기 한문학의 대가 또는 ‘월상계택(月象谿澤)’으로 칭송되었다. 월상계택은 월사(月沙) 이정구, 상촌(象村) 신흠, 계곡(谿谷) 장유, 택당(澤堂) 이식을 일컫는다.
<역사·고전인문학자 massj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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