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남(錦南) 최부(崔溥·1454~1504)는 조선시대 당시 어찌 보면 원하였던, 원하지 않았던 남다른 인생을 살았던 인물이다. 파란만장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는 뛰어난 문신이자 유명한 『표해록(漂海錄)』(일명 『금남표해록(錦南漂海錄)』)이라는 여행기를 썼고, 수차(水車)를 제작하여 경작지에 물을 공급하도록 해 농업생산에 기여를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면 그가 표해록을 쓴 과정을 살펴보자. 표해록이란 바다를 표류한 체험을 다룬 실기를 말한다. 최부가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제주도에서 근무를 할 당시인 1488년(성종19) 윤1월 3일 고향 나주로 가기 위해 제주도를 출발하였으나 풍랑을 만나 일행 42명과 함께 중국 명나라 태주부 임해현(현 절강성 영해현)에 표착하였다가 귀환하게 된 이야기를 기술한 작품이다.
전라남도 나주 출신인 최부는 조선 중기 사림을 대표했던 유학자 김종직의 문인으로 1482년 친시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486년 문과중시에서 아원(亞元·장원 다음)으로 급제한 인재였다. 1487년 9월 죄를 지은 자들이 제주로 달아나는 경우가 많아 이들을 잡는 추쇄경차관의 임무를 띠고 제주도에 부임하였던 것이다.
이듬해 그는 부친의 부고를 듣고 일행과 함께 나주로 향하다 풍랑을 만나 이들이 탄 배는 14일 동안 동지나해를 표류하였다. 표류하다가 해적선을 만나 물건을 강탈당하는 등 곤욕을 치른 후 중국 명나라에 도착했다. 그런데 도착해서도 왜구로 오인되어 몰살당할 뻔하기도 했다.
최부 일행은 중국 관원의 안내로 당시 물류의 중심이자 남중국 최대의 도시로 번성했던 절강성의 항주와 강소성 소주를 거쳐 진강에 이르렀으며, 양자강을 건너 양주·회안·서주를 거쳐갔다. 이어 산동성과 하북성을 지나 북경에 당도했다. 북경에 도착한 뒤 명나라 효종을 알현하고 명나라의 도움으로 북경·요동·의주를 거쳐 1488년 6월 14일 한양으로 돌아와 조선 임금 성종을 알현하였다.
성종은 8000리 길을 거쳐 온 중국 땅에서의 견문을 기술하여 바치도록 명하였다. 이에 최부는 표류를 시작해 귀국할 때까지 보고 들은 일을 「중조문견일기(中朝聞見日記)」 세 권으로 나누어 찬술하여 바쳤는데, 뒤에 표해록으로 간행되었다. 일명 금남표해록 3권으로, 약 6개월간의 견문기를 일기체로 쓴 것이다.
최부의 표해록에는 15세기 명나라 연안의 해로·기후·산천·도로·관부(官府)·풍속·군사·교통·도회지 풍경 등이 소개돼 있다. 그는 방문한 도시마다 풍물을 관찰하여 세세하게 기록하였고, 운하를 통한 물자운송으로 경제적 효율성에 대하여 심도 있게 서술하였다. 또한 물길인 운하의 제방과 수문에 대한 기록과 수문의 비문 내용을 기록한 점은 중국 운하사(運河史)의 중요한 문헌으로 평가되고 있다. 즉 이 책은 표류 때 미신을 믿는 시종들과의 갈등, 왜구와의 조우, 영파부에 표착 시 왜구로 오인 받아 사형의 위기에 봉착했던 일, 중국을 종단하면서 보고 들은 일 등을 포함해 다양한 내용이 망라되어 있어, 해양문학의 효시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니까 최부는 제주도 앞바다에서 1월부터 표류를 시작해 6개월 동안 중국 각지를 거쳐 한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연산군 때 중국에서 배워온 수차제도를 관개에 응용하는 시도도 했고, 또 질정관(質正官·특정의 사안에 대하여 중국 정부에 질의하거나 특수문제를 해명, 학습하는 일을 담당하는 사신)으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상중이지만 임금의 지시로 표해록을 저술한 일로 잠시 파란을 겪었지만 그의 벼슬길은 순조로웠다. 하지만 사림파와 훈구파의 갈등으로 벌어진 사화의 혹독한 정치파동을 겪게 되면서 파탄의 길을 걷게 된다. 1494년 성종이 승하하자 19세의 나이로 즉위한 연산군은 유교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두 차례의 사화를 일으켜 김종직을 필두로 한 사림파에 가혹한 탄압을 가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 문하인 이종준·이구·김굉필·박한주 등과 함께 붕당을 이루어 국정을 비난했다는 죄명으로 장 80대에 함경도 단천에 유배되었다. 연산군 10년에 다시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처음에는 “장 100대에 거제로 귀양 보내며, 노비로 삼는다”는 처벌이 내려졌지만 결국 참형을 당했다. 그는 처형장에서 한마디의 말도 없이 담담하게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사관은 실록에서 “최부는 공렴정직하고 경사(經史)에 널리 통했으며, 문사(文詞)에 능했다. 간관이 되어서는 아는 것을 말하지 아니하는 것이 없었으며, 회피하는 일이 없었다”고 묘사했다.
그의 표해록은 중종 후기에서 명종 연간까지 사이에서 동활자본으로 처음 간행되었고, 외손인 유희춘이 1569년(선조 2)에 평안도 정주에서 목판본으로 다시 간행했다. 유희춘은 4년 뒤인 1573년(선조 6)에 전남 나주에서 남원본으로 불리는 교정 목판본을 또 간행했다.
한편 최부의 표류기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널리 읽혀졌다. 일본에서는 1769년 기요타 기미카네(淸田君錦)가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라는 이름으로 번역 출간하였으며, 1965년에는 미국의 J.메스킬 교수가 영역하였다. 또 중국 베이징대학 거전자(葛振家)가 중국어로 번역하였으며, 1975년 최기홍이 국역하였다. 국내본에는 목판 3권 2책의 한문본과 3권 3책의 국역 필사본 표해록이 있다.
표해록을 간행하고 발문을 쓴 유희춘은 그의 외손이다. 최부의 묘소는 전남 무안군 몽탄면에 있으며, 생가터는 나주시 동강면 인동리 성기촌이다. 중국 절강성 영해현 월계촌에 현지의 행정 당국과 최 씨 문중의 협조로 ‘최부표류사적비’가 2002년에 세워져 있다.
<참고자료>
-최부 지음, 서인범·주성지 옮김(2005), 『표해록-최부』, 한길사.
-박원고(2005), 「崔溥 『漂海錄』 飜譯述評」, 『한국사학보』 21, 고려사학회.
-박원호(2003), 「崔溥 『漂海錄』 板本考」, 『서지학연구』 26, 한국서지학회.
-주성지(2019), 「구글맵을 활용한 최부 『표해록』의 노정 복원」, 『역사민속학』 57, 한국역사민속학회.
-최철호(2008), 「최부(崔溥)와 표해록(漂海錄)」. 『민족연구』35, 한국민족연구원.
<역사·고전인문학자 massj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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