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보는 사람이야기(61)- 수많은 벼루를 가슴에 지니고 산 여항문인 조희룡

102개 벼루 모은 청나라 금농의 별호 '백이연전부옹' 차용 서재 이름 호명
유배 후 귀향하니 소장 벼루들 흩어져, 이후 가슴에 이들 지니고 작품활동

조해훈1 승인 2020.12.17 19:40 | 최종 수정 2020.12.17 21:03 의견 0

청나라 때 금농(金農·1687~1764)이란 서화가가 있었다. ‘백이연전부옹(百二硯田富翁)’이란 별호를 사용했다. 그는 시를 잘 짓고 그림을 잘 그렸다. 그는 벼루를 모으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림을 팔아 돈이 생기면 벼루를 구입했다. 그러다 벼루가 102개가 되자 스스로 위의 별호를 사용했다. 그는 벼루를 밭으로 생각했다. 벼루의 생김새가 밭과 같았을 뿐더러 밭이나 벼루나 ‘갈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백이연전부옹의 뜻처럼 102개의 벼루가 생기자 이제 자신도 부자가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19세기 조선에 여항문인이자 서화가인 우봉(又峯) 조희룡(趙熙龍·1789~1866)이란 예술가가 있었다. 추사 김정희의 문인으로 「매화서옥도」·「홍매대련」 등을 그린 화가로 잘 알려져 있다. 중인 신분이지만 1813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오위장(五衛將)을 지냈다. 현재 간송미술관이 그의 그림인 「매화서옥도」를 소장하고 있다.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조희룡의 '매화서옥도'.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조희룡의 '매화서옥도'.

그런데 이 조희룡이 자신의 서재 이름으로 금농의 별호인 ‘백이연전부옹’를 차용하였다. 그에게 벼루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벼루에 대한 그의 말을 들어보자.

“벼루라는 것은 먹을 가는 도구이지만 붓을 적시는 일만 하는 게 아니다. 옥처럼 따뜻하므로 이를 본받아 수양할 수 있고, 갈아도 닳지 않으므로 이를 본받아 양생(養生)할 수 있다. 그러니 벼루(硯)라는 한 글자는 내가 평생 애용해도 될 것이다.”

그에 따르면 벼루는 단순히 먹을 갈아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도구만은 아니다. 벼루의 성질이 온윤(溫潤)하여 사용하는 사람이 그 성정을 본받을 수 있고, 또 벼루는 닳아 없어지지 않으므로 이런 특성으로 인해 그걸 사용하는 사람이 장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희룡의 간찰로 빌려간 벼루를 돌려달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수경실 소장.
조희룡의 간찰로 빌려간 벼루를 돌려달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수경실 소장.

조희룡은 벼루의 이러한 점을 높이 샀다. 시를 짓고,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그이므로 벼루는 그에게 그만큼 소중했으며, 물건 이상의 존재 가치를 지녔다.

또한 그는 벼루 중에서 옛날 것을 선호했다. 그의 벼루에 대한 글을 조금 더 보자.

문인이 벼루를 가지는 것은 미인이 거울을 지니는 것과 같은 것이다. 평생 동안 가장 가까이 있으므로 거울은 진나라·한나라 때의 것이어야 하고, 벼루는 반드시 당·송시대의 것이어야 한다. 이 말을 내가 의심했었는데, 지난 번 벼루를 입수하면서 깨우쳤다. 새로 만든 벼루가 아름답지만, 옛날 벼루만 못하다.

미인에게 거울이 소중하듯 문인에게는 벼루가 중요하다. 조희룡은 체험적으로 당대의 벼루보다는 옛날 벼루가 더 좋다는 걸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글에서 그의 벼루에 대한 애정과 감식안이 느껴진다.

그런 조희룡은 난초를 그릴 때는 언제나 옛날 벼루를 사용했다고 한다. 특히 진한시대의 아방궁·동작대·미앙궁 등에 사용된 기와로 만든 벼루를 좋아했다. 그건 왜 그랬을까? 아마도 천 년이 훨씬 더 지난 벼루에 먹을 갈아 난초를 그려야만 그 예스러움이 그의 손끝을 통해 그림에 묻어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예스러움이 아니면 제대로 표현이 되지 않는다고 여겼을 것이다. 또한 그는 서화가에게 좋은 붓 한 자루는 무사에게 좋은 검 한 자루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어느 날 조희룡은 추사에게 좋은 벼루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 벼루를 한 번 써보자는 부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친구인 안진석에게 편지를 써 대신 부탁을 넣었다.

그런 와중에 추사 김정희와 아재 권돈인이 왕실의 전례(典禮)문제로 유배를 갔다. 조희룡도 그 일에 얽혀 1851년 전라도 임자도에 유배되었다가 1853년에 귀향하였다. 조희룡이 돌아오니 그 많던 벼루가 흩어지고 단지 깨진 벼루 하나만 남아있었다. 좋은 벼루였으나 깨진 벼루였기에 사람들이 버리고 간 것이다.

특이한 행적을 남긴 중하층 인물 42인을 기록한 조희룡의 저서 '호산외방'.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특이한 행적을 남긴 중하층 인물 42인을 기록한 조희룡의 저서 '호산외사'.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조희룡은 중국 진(秦)나라 때 말을 잘 보기로 으뜸이었던 구방고(九方皐)에 빗대어 자신은 벼루의 상을 본다고 했다. 그리하여 그는 “눈앞의 벼루는 이미 없어졌어도 가슴 속의 벼루는 아직 그대로 있음에 웃는다”라고 했다. 소장하던 벼루의 실물은 없어졌지만 가슴 속에 둔 벼루는 그대로 있으니 괜찮다는 것이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난초나 풀, 돌이 가슴 속 벼루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청나라 금농이 그랬던 것처럼 마음속에 102개의 벼루를 지니고 살았다.

그의 자서전적인 저술인 『석우망년록(石友忘年錄)』 등에 이러한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그는 이 외에 당시의 미천한 계층 출신의 인물 중 학문·문장·서화·의술·점술에 뛰어난 사람 42인의 행적을 기록한 일종의 열전적인 저술인 『호산외사(壺山外史)』 등도 남겼다. 중인계급의 인물치고는 드물게 조희룡의 전집이 번역되어 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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