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서상균]

24. 또 다시 지주의 횡포

추석날 성묘를 마치자 모처럼 명촌의 금찬씨를 방문하기로 했다. 아직은 언니인 김해의 순찬씨가 살아있어 지금쯤 노인요양병원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와 있겠지만 거기는 따로 문병을 하고 자기는 외진 곳에서 없이 산다고 형제들이 잘 돌보지 않는다고 툴툴대는 금찬씨를 한번 들여다보기로 한 것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아이 둘을 포함한 여섯 명 대가족이 차가 막힐지도 모르는 김해까지 가는 것이 불편한 점도 없지 않았지만.

“여보, 장촌은 안 가 봐도 될까?”

“거기는 조용히 잘 지내잖아? 먹고사는 것도 넉넉하고.”

“그래도 외로울 텐데.”

“허허, 우리 자영이 외롭다고? 돈 벌리면 즐겁고 돈 들어가면 괴롭고 그 나머지 외롭고 슬프고가 없는 분인데.”

“그래도 그렇지 않지. 나이 칠십 넷의 상 어른 아잉교? 또 당신 칠 남매 중에 당신위에 남은 딱 한 사람의 남잔데?”

“하긴. 이따 시간 봐서 가지.”

매형이 자라던 본가에 혼자 살던 자영의 어머니(사실은 계모)가 죽자 명절제사를 서울의 큰집으로 옮겨가 나이 예순 넘은 사람이 서울까지 제사지내러 다닌다고 툴툴대다 일흔이 넘고는 그 마저 가지 않으니 가뜩이나 딸 하나밖에 없는 집이 명절당일 낮에 잠깐 세 아이를 데리고 온 미진이내외가 저녁을 먹고 돌아가면 적막하기가 짝이 없다고 했다.

한번은 유독 명절연휴가 긴 설날이 지나고 아버지 제사에 만난 막내 백찬씨가

“닷새나 되는 설 연휴에 누님하고 자영은 뭐 하고 세월을 보냈노?”

물으니

“동네 할마시들이 자식들 온다고 경로당에 안 나오니 내가 심심해 죽을 판이지 너거 자영은 문제없다.”

“우째서? 요새도 틈만 나면 창고에 들어가서 나락가마니 세어보고 다섯 개씩 뒤집어 쌓나?”

“쌀값이 떨어져서 그런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인자 그 짓은 안 한다.”

“그라면 심심할 긴데?”

“컴퓨터로 고스톱 친다 아이가?”

“그것도 눈이 침침하고 머리 아플 긴데?”

“그래서 내보고만 자꾸 짜증을 낸다 아이가?”
“그렇게 쓰지도 않는 돈을 자꾸 모으기만 해서 뭐한단 말이고?”

“물론 나중에 지 딸 미진이 주겠지만 지금은 미진이한테도 일 전 한 푼 어림없다. 경우가 아니면 천 원짜리 하나도 얼른없다.”

“그래서 요번에도 10만 원 받아왔나?”

“그래. 내 잡비 남은 것 3만 원 하고 13만 원이면 되지.”

“참, 희한한 사람도 다 있네.”

“자기는 죽을 때 죽더라도 죽는 그 순간까지 최대한으로 돈을 모아보는 게 희망이래. 더 이상 말도 못 붙이게 해.”

그런 고차대씨에게 열찬씨가 한번은 크게 실수를 한 일이 있었는데 모처럼 같이 수원에 제사를 지내고 오다 저녁을 먹고 헤어지기에 앞서

“누님, 올해는 내가 숙직한다고 설에도 못 가고.”

미리 준비해온 봉투하나를 주다가 하도 부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금찬씨에게도

“아나, 누님도.”

5만 원짜리 하나를 꺼내주고 유심히 바라보는 고차대씨에게

“장촌사람들 앞에 돈을 꺼내는 것은 공자 앞에 문자 쓰는 격이고.”

하고 헤어졌는데 나중 영순씨로 부터 엄청난 책망을 들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남이 받을 때는 자기도 받아야 되지 혼자 빼먹으면 너무나 섭섭할 것이라고 했다. 나중에 영순씨가 조심스레 덕찬씨에게 반응을 물어보니 그날 저녁 푸, 푸 한숨을 쉬며 오랫동안 잠을 못 이루더란 것이었다. 그래서 다음 명절에 영순씨가 아들 정석씨에게 무어라고 했는지 일부러 장촌에 찾아가 세배를 하고 고모내외에게 5만 원짜리 하나씩을 드려서 맘을 풀게 한 것이었다.

“할마시 있능교?”

영순씨가 주차를 하는 사이 두 아이의 손을 잡고 먼저 들어간 열찬씨가 부르자

“아이고, 이기 누고? 우리 동생이 얼라들까지 데리고.”

금찬씨가 반색을 하고 나왔다. 큰길에서 보아도 덩그런 2층 건물의 널따란 거실에 사람이라고는 누님 혼자뿐이었다.

“형님, 명절 잘 씼능교?”

“그래. 이래 다들 온다고 했으면 며느리를 붙잡아 놓을 것을...”

부엌으로 들어가는 금찬씨를 잡고

“얼라들 절부터 먼저 받고 같이 상 차립시다.”

영순씨가 주저앉히자 말자

“추석에 복 많이 받으세요.”

“복 많이 받으세요.”

네 살, 세 살 두 아이가 비틀거리며 절을 하자

“보자아.”

호주머니에 손을 넣은 금찬씨에게

“마, 놔두소. 고모가 무슨 돈 있노?”

하며 아들에게 눈짓을 하자 금방 봉투를 꺼내주었다.

“네 집 식구들이 모일 텐데 이래 음식도 없이...”

조그만 상에 과일과 커피를 담아 들고 나오는 영순씨가 혀를 차자

“우리사 믿는 집안이라 뭐 다들 아침에 모여서 명절예배만 드리면 되니까.”

“그래도 아침 먹을 준비는 해야지요?”

“뭐 삼겹살이나 구워먹으면 되지.”

“그래 며느리하고 아들은 요?”

“아침 먹고 화식이, 준식이네 식구 가고 나서 저거도 저거 언니 집인가 어데 간다고 같이 나갔다. 머시마 둘은 저거 친구 만나러 가고.”

“이따 은주네 식구 올 것 아잉교?”

“오겠지.”

“이래 음식이 없어 사위 오면 뭐 먹일랑교?”

“내가 아나? 살림 사는 며느리가 할 일이지?”

“아니, 위서방이 형님 사위지 며느리사윙교?”

“그렇지만 내가 뭐 우짜라꼬? 살림 사는 사람이 안 하는데?”

“아이구야!”

영순씨가 혀를 찼다. 아이 둘이 있는 은주가 청주의 총각에게 시집을 가고 첫 명절에 남편과 함께 친정에 왔는데 커다란 집에는 금찬씨 혼자 남아

“오나?”

하고 상을 차려올 생각을 않아

“오빠하고 언니는?”

“몰라. 산소 갔다 와서 너 오빠 둘이는 집에 가고 큰 오래비는 지 각시하고 저거 동새집에 갔겠지.”

“위서방하고 내가 온다고 말 안 했나?”

“했지.”

“그런데 아무 말 않더나?”

“어무이 언니집에 갔다 올게요 하고 나갔지.”

“저런 얌체! 가면서 뒤돌아보고 ‘어머니 사랑합니다.’ 하고 머리에 하트 그리지 않더나?”

“그렇지.”

“말만 사랑하면 뭐 하노? 자기 할 일은 안 하고. 그래서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질색을 하지.”

하고 주방에 들어가 상을 차리려던 현주씨가 눈물이 글썽해서 밖으로 나와

“엄마, 옷 입으소.”

“와?”

“묵을 기 하나도 없는데 우짜노? 세상에 사위가 명절이라고 처음 처가에 오는데 이기 뭐고?”

“몰라. 내가 아나? 살림 사는 지가 알지.”

해서 읍내로 나가 밥을 사먹고 명촌에 어머니를 데려다주고 울면서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그걸 어머니나 올케 귀에 들어가라고 영순씨에게 이야기를 해 말이 한 바퀴 돌았지만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든 말았든 아이 둘은 그 넓은 거실을 뛰어다니다 이젠 2층 올라가는 계단에 붙어 오르내리기를 반복하자 아이어미아비는 두 아이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열찬씨 혼자 조용히 밖으로 나와 늘 가던 칼치못을 한 바퀴 빙 둘러보며 좋은 술친구이자 골치 아픈 매형인 수진씨를 떠올리며

(저승에선 술은 안 굶는가? 엔간히 마시고 내 가 빌려준 돈만 잘 굴려도 매형도 잘 살고 나도 그 돈 받아 한 10년은 일찍 셋방살이를 면했을 텐데. 그 때 돈 100만원이면 방하나, 부엌하나짜리 전세금이 되고 2,3백이면 상가건물에 작은 점포를 살 수가 있었는데...)

그렇게 힘들게 살면서 여태 영순씨가 한 번도 열찬씨를 원망하지 않았듯이 열찬씨도 금찬씨에게 타박한 일이 없는 그 쓰라린 기억을 떠올리며 돌아오다

(어라?)

언덕아래 대밭자리가 벌겋게 황토 흙을 드러낸 것을 바라보고 깜짝 놀랐다. 누가 불도저로 대밭을 한 2,3백 평 밀어붙이고 엉성하게 밭을 만드는 시늉을 해놓은 것이었다.

(누가 집을 지으려나? 그러고 보니 집터로도 괜찮겠네.)

하고 원래의 모습 누님집 앞에서 부터 칼치 못에 이르는 한 300미터의 오솔길 아래로 주욱 대밭이 이어지고 그 속에 두어 채 초가집이 있었던 기억, 그 중의 한 노인이 늘 기다란 삽가래를 짚고 누님 집에 들랑거리던 기억을 떠올리며

“누님, 누가 대밭을 밀고 땅을 파헤쳐 놨던데?”

“그래 울산사람이 도산떡 땅을 사서 택지개발한다 카더라.”

“그래 도산영감은 죽고?”

“벌새 죽었지. 울산 사는 저거 큰아들이 너거 자영보다 몇 살 아랜데 몽땅 팔고 나갔다 아이가?”

“그럼 저 골짝에 전원주택이 들어선단 말인데. 땅은 다 팔렸는가?”

“내가 아나? 우리 박장로한테 물어봐야 알지.”

“박장로라?”

“그래 우리 일식이가 추석전에 장로장립했다 아이가?”

“가가 벌써. 올해 나이가 몇인데?”

“갓 쉰 아이가?”

“장로가 그래 젊은 장로가 있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어릴 때 보던 70이 넘어 머리가 허옇고 허리가 구부정하고 예배시간에 기도를 해도 가는 목소리가 떨리고 끊어지고를 반복하던 염소영감 같은 모습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그 교회는 언간이 사람도 없는 갑다.”

“무슨 소리고? 우리 일식이가 얼매나 신앙이 좋은데. 또 김해언니가 얼매나 기도를 하고... 그 언니가 정신이 있었으면 우리 일식이가 장로가 되었다고 얼매나 기뻐할 건데.”

“장로 하면 뭐 하노? 명절에 지 재매가 처음 처가 나들이를 해도 밥해줄 생각도 않는 주제에.”

순간 깜짝 놀란 영순씨의 눈빛이 화살처럼 쏘아와 아차 심었지만

“니는 모른다, 니는 모른다. 너거 자영 죽고 내가 아아들 다섯이 먹이 살린다고 얼매나 고생을 한지.”

말을 돌리는데 선수인 금찬씨는 벌써 엉뚱한 이야기를 꺼내며 금방 눈물이라도 흘릴 기세라

“그래. 일식이가 장로면 또식이랑 다른 식구들도 전부 집사겠네.”
“그래. 일식이각시는 천집사. 또식이는 박집사, 저거 각시는 최집사, 나는 가집사. 우리 교회에서 우리 식구가 제일 숫자도 많고 신앙도 좋다 아이가?”

금방 신이 나서 천진스럽게 웃는 것이었다.

“그럼, 일식이, 아니 박장로 오면 나한테 전화 좀 하라카소?”

“와? 땅 살라꼬?”

“꼭 사기보다는 값이나 함 알아볼라꼬.”

“그래. 월랜가 좌천인가는 땅이 영 아이더라. 또 너거 장촌자영도 처남이 원자력발전소 개작은 데 사람 몸에 안 좋은 데 농사짓는다고 걱정이 태산이던데.”

“일단 알아나 볼라고요.”

하고 돌아오면서

“당신 돈 많은 가베요?”

영순씨가 백미러로 아이들의 눈치를 살피며 묻는데

“당신이 내가 그렇게 좋아나는 농사짓는 땅을 못 사줘서 안달을 했다 아이가?”

“그렇기는 하지만 돈도 한두 푼이 아닐 거고 또 길도 멀고 무엇보다 아직 자식은 집도 못 사고 있는데.”

하며 노골적으로 아들을 들먹이자

“우리는 신경 쓰지 마세요. 아파트당첨이 되어야 집을 사지. 또 우리는 어느 정도 벌어놔서 신혼아파트 당첨만 되면 금방 살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고 아버지 농장 겸 글방을 만들어주면 좋지요.”

“그래 말이야. 그게 한두 푼 드는 것이 아니라서.”

[그림=서상균]


그날 저녁에

“외삼촌 땅 살려고요?”

일식씨의 전화가 와서

“그래 장로장립을 축하한다. 우리 조카가 그렇게 큰 사람이 된 줄을 몰랐구나?”

“아, 아입니더.”

“그래 그 택지개발한다는 땅은 다 팔렸는가?”

“예. 울산의 장영희라는 사람이 도산할배 땅 3천 몇 평을 사서 택지개발을 한다고 도로를 내고 하나씩 똥갈러서 좋은 자리 다섯 곳은 팔고 한 다섯 곳 남았지요.”

“그래? 콘테이너박스나 하나 놓고 농사지을 땅이 있나 알아봐라.”

“와요? 외삼촌이 농사짓게요.”

“그래 내가 당뇨가 있어 운동사마 해볼라꼬.”

“예. 안 그래도 현장으로 바로 찾아오는 사람들은 내가 중간에 들어서 소개를 하는데 도로에 들어가는 땅 빼고 그늘진 땅 빼고 농사짓거나 집지을 땅은 딱 하나 남았는데요.”

“그래 몇 평이나 되는데?”

“도산할배 집턴데 한 300평이 넘지요.”

“그래 평당 얼마나 할랑가 한번 알아나 봐라.”

“예. 그 기 두 필진데 반쪽인 대지는 한 7,80만 원, 반쪽 밭터는 한 6,70만 원 할 겁니다.”

“그래? 한번 생각해보자.”

하고 전화를 끊자

“당신 간도 크다. 70만 원 잡고 땅이 300평이면 2억이 넘는다.”

“그래도 땅만 마음에 들면 우째 한 번 해봐야지.”

“거 참 희한하네. 당신 같은 꼼쟁이영감이. 혹시 내 몰래 꼬불쳐논 돈이라도 있소?”

“씰 데 없는 소리.”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