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서상균]

23. 문서없는 노예가 되어(13)

추석이 다가와 가을빛이 완연해면서 풀벌레소리가 한층 애잔해졌다. 오후 5시에 시작하는 야구가 일찍 끝난 날 저녁 여덟 시경 혼자 방수탁자에 앉아 아직까지도 희미하게 머물던 눈앞의 어둑어둑한 밭이랑과 고추대궁이에 머물던 희미한 잔광이 사라지며 실낱같던 그믐달이 지면서 안개가 풀리듯 조금씩 건너 산마루의 잡목림에 고이는 어둠을 바라보면서 이제 주로 음악이 흘러나오는 라디오를 듣는데 사방이 나지막한 야산으로 둘러싼 고요한 분지 안에 사람이라고는 오직 제 하나만 남아 어둑한 하늘을 바라본다는 생각, 아무리 가족이 있고 아내가 있어도 사람은 영원히 외로운 존재라는 생각으로 저 북동 쪽로 트인 단 한곳의 시야, 서생읍의 불빛만이 인간의 흔적으로 명멸하는 전망을 오래오래 바라보다 문득 한기가 느껴지면 방에서 잠바를 가져다 입어 다시 어둠을 주시했다.

맞은 편 동산 13시 방향에 커다란 소나무가 하나 있었는데 어둠이 완전히 사방을 감쌀 때쯤이면 처음 어둑어둑할 때는 가지 끝이 들쭉날쭉하던 실루엣이 둥그런 어둠으로 산 전체의 무게를 잡고 아직도 가지 끝이 들쭉날쭉한 참나무와 아카시아, 오리나무 같은 잡목의 실루엣을 수렴했다.

(역시 소나무는 소나무야, 멀리서 보는 윤곽도 좋지만 수채화처럼 어둠을 먹어가는 모습도 좋고 수묵화처럼 하나의 침묵과 적막 또 말없음표가 되는 것도 대단해!)

혼자 긴 상념에 젖다

(그래. 순영씨와 나 사이가 어릴 때는 파스텔화처럼 그리움으로 번졌고 이십대 초반엔 반 고흐의 해바라기나 보리밭처럼 어지럽게 들뜬 그 무엇이다가 다시 만난 이후엔 수채화처럼 포근하고 따스한 무엇이기를 원했는데 예순이 넘은 지금은 하나의 수묵화 같아. 저 어둠이 잔뜩 고인, 소나무, 아니 스스로 어둠을 잔뜩 먹은 소나무...)

하다 이슬이 맺힌 풀 섶을 한참이나 걷다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광복절이 지나면서 아침저녁 공기가 쌀쌀해져서 바람 쐬러 나오면서도 잠바나 추리닝을 걸쳐야했다. 아직 고춧대는 세워두었지만 고추가 잘 익지 않아 가끔 올라오는 영순씨가 부지런히 따 모아도 한두 소쿠리정도로 말리면 한 근도 채 안 되었다. 수세가 약해져 잎은 물론 줄기까지 시들시들한 오이와 한 번도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한 참외와 수박덩굴도 걷었다. 구릿빛 피부의 무어인처럼 언제나 싱싱하고 강인한 자주 빛 가지는 여전히 노란 꽃을 피우는 족족 열매를 맺어 한자도 넘게 길게 자랐고 단 한포기가 살아남았지만 수십 개로 포기 나눔을 하여 작은 숲처럼 된 방울토마토는 여전히 오롱조롱 붉은 열매를 맺어 금방 한소쿠리씩을 따오면

“우리 아빠 농사 중에선 토마토가 제일 맛있어.”

두 아이를 데리고 온 슬비씨가 감탄했고 웬만해선 손이 안 가던 영순씨도 한 번 맛을 보더니 마니아가 되고 말았다.

8월 20일 경에 김장 무를 심고 싹이 날 때쯤인 9월초에 김장배추 200포기를 사다 심었다. 밭에 직파하지 않고 모종을 사다 심는 경우 무보다 한 달 가까이 늦게 9월 중순에 심어도 넉넉하다고 했지만 농장에 오가는 길에 단 한 곳이라도 고추든 배추든 마늘이든 무얼 심는 것이 보이면 당장 자기 밭에 심지 않으면 무슨 큰일이라도 날 듯 조바심을 내는 영순씨에게

“김장배추는 아직 멀었다. 그 사람들은 시간이 너무 남고 심심해서 벌써 심는 거지.”

하고 설명해도

“그렇게 빠르다면 어째 종묘상에서 모종을 다 팔까? 심어도 되니까 모종이 나오지.”

“아니 그건 농사꾼 상대가 아니라 도시근교에서 재미사마 농사를 짓는 노인네 들이나 주말농장을 겨냥해서 파는 거라니까?”

“그럼 종묘상에 가서 물어보면 될 것 아이가? 그 사람들도 다 자격증이 있고 수시로 교육도 받는다고 하던데.”

“종묘상 사람들은 언제나 무슨 모종이나 조금 일찍 시작해서 조금 늦을 때까지 계속 파는 거지. 그 사람들은 오로지 매상이 목표니까.”

“하긴...”

세상에는 영순씨처럼 호기심이 가득한 초보농군이 많아 종묘상에만 가면 이것, 저것 둘러보면서 이게 뭐라는 작물인가 어디에 좋은가 물어보고

“여보, 우리도 몇 포기 사다 심어볼까?”

하다가 농약이나 식물영양제를 사는 사람들을 바라보다

“우리 배추밭에 뜨물이 드는 것 같던데.”

방금 전 평생 처음으로 들어본 <뜨물>을 들먹이고 약을 찾으면 종묘상은 뜨물 약은 물론 활착제나 영양제를 같이 쓰는 것이 좋다고 한수를 더 뜨고 영순씨는 기어이 그걸 또 사고야 마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괭이, 호미, 낫을 비롯한 농기구에도 관심이 많아

“이건 괭이도 아니고 호미도 아닌 참 신기한 물건이네.”

“예. 그건 허리도 굽히지 않고 서서 잡초를 제거하는 개량호미지요.”

“값이 꽤 비싸지요. 예. 호미하나에 2천원인데 그건 하나에 3만원이나 한답니다.”

“여보, 우리도 하나 사지 뭐.”

“아니, 그걸 꼭 비싼 돈 주고 사야 되나?”

“아니, 난 당신 일 덜어줄려고 하는 거지.”

하면서 개량호미는 물론 고춧대를 매는 기구, 양파를 심는 날이 가는 호미, 심지어 비닐을 씌울 때 흙을 덮는 것보다는 철사 고리로 고정시키는 것이 낫다고 ㄷ자형 고리까지 사는 것이었다. 올해는 늦더위가 심해 아무래도 김장배추는 천천히 심어야겠다고 했지만 9월 8일이 추석으로 추석이 되기 전에 배추를 심고 느긋이 추석을 쐬어야지 배추를 심지 않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추석을 쐴 기분이 아니라며 기어이 추석 일주일 전에 심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심은 배추가 낮에는 죽은 듯이 늘어졌다가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면 슬며시 고개를 들더니 한 사나흘 지나자 마침내 활착을 하면서 똑 바로 섰다. 이제 밭에 특별히 더 할일도 없는 열찬씨는 창 너머로 언덕배기의 돼지감자 꽃이나 보면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기가 일쑤였는데 언제부턴가 밭에 나서면 웅웅거리는 벌의 날개 짓소리가 요란했다. 들깨 꽃이 핀 것이었다. 여태 살아오면서 들깨도 열매가 맺는 식물이지만 꽃이 피기는 피겠지, 하고 별 볼품도 없는 희끔한 꽃을 연상했는데 정작 가까이서 보니 그게 아니었다. 감자를 캐낸 자리를 비롯해 어중간한 공터는 물론 아래쪽 이선생네 호박밭가운데도 좀만 벗겨진 자리가 있으면 모조리 들깨를 심었는데 들깨가 새 땅에 잘 맞는 식물인지 곳곳이 키가 한 길이나 되고 뿌리 짬이 한 줌이 넘어 엔간한 나무만 한 들깨의 무성한 가지마다 하얀 들깨 꽃이 만발하여 진한 향기를 풍기자 인근의 벌과 말벌은 물론 짝퉁벌 나나니와 등애, 웬 파리 떼까지 꿀을 따느라 윙윙거리는 소리가 어울려 마치 합창단이나 오케스트라처럼 적막한 농장을 에워쌌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바람도 시원했다. 이제 며칠 후면 서울의 손녀들이 내려오고 한동안 시끌벅적 가족의 의미, 할아버지의 재미를 즐길 것이었다. 그러다 문득

(그 사람은 잘 지낼까? 너무 성격이 강한 부자가 서로 적응을 못 해 일부러 아들을 먼 제주도로 이사시켜 생활비의 일부를 대어주면서 명절에도 집에 오지 말라고 해서 밤톨같이 또록또록 귀여운 손자 셋이 너무 보고 싶어 명절마다 눈물이 난다고 하더니...)

문득 가슴 저 깊은 곳에 묻어둔 얼굴 하나가 떠올라 한나절 내내 가슴이 먹먹했다. 휴대폰을 꺼내 주소록을 검색해 오랜만에 그 볼 때마다 새삼스런 이름 석자를 바라보며 가슴이 뭉클해져 금방이라도 뽕뽕뽕뽕 번호를 눌러 통화를 해보려다가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나? 명절 앞에 괜히 남의 집안에 분란을 일으키려고...)

하고 전화기를 닫고 평상에 벌렁 드러누워도 좀체 마음이 갈아 앉지 않아 한참 만에 다시 휴대폰을 켜고

-외진 산골에 하얀 들깨 꽃도 피었다. 들깨 꽃이 이렇게 향기가 진한 꽃이었던가? 나보다 키가 큰 들깨 밭의 벌떼가 윙윙거리는 소음 속에서 널 생각한다. 올해 가을은 또 얼마나 그리운 세월을 보내야 할지...-

문자를 보내고 벌러덩 드러누워 잠이 들었는데 문득 벨이 울려

“여보세요?”

하다

(아!)

먹먹해지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우째?”

“우째는 무슨? 자기가 먼저 애달픈 문자를 넣어놓고.”

“그래 통화는 가능하고?”

“철물점에 간다고 잠시 나갔는데 오래는 못 해요.”

“그래요. 잘 지내고?”

“예. 그럭저럭.”

“그런데 참 희한하제?”

“와?”

“오늘 문자 올라고 그랬는지 어제 밤 꿈에 열찬씨가 왔어요.”

“응?”

“점심 먹고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 평생 안 하던 화투 패를 떼는데 삐리리 문자가 다 오고.”

“나도 오늘 들깨 꽃을 보다 갑자기 억장이 무너질 것 같아서.”

“우짜겠노? 참고 살아야지. 그래 몸은 성하고?”

“좋아요. 당신은?”

“나도 좋아요. 살이 자꾸 쪄서 그렇지.”

“얼굴 본지 한 3년 되었네. 한 번 볼 수 없을까?”

“글쎄요. 나도 몸 빼기가 어렵지만 수자가 시간이 날랑가?”

“한번 와 보소. 여기는 장안읍 오리라는 곳인데 아주 호젓하고 분위기가 좋아요.”

“그 때 전화로 들은 것 같네. 고리원전 앞에 월내라고. 자동차로 잘 찾아질지 모르겠네.”

“그래요?”

하는데

“전화 끊읍시다. 대문 여는 소리가 난다.”

“...”

(다 늙어 이게 무슨 꼴인가?)

픽 웃으며 다시 벌렁 드러누워 아직도 귓가에 생생한 목소리를 더듬다가 또 잠이 들었는데 한참 후 삐릿삐릿 메시지 오는 소리가 들려 바라보니

- 추석 전에 한번 가겠음. 언제 가면 될까요? -

뜻밖의 소식이라

-일요일만 빼면 언제나 환영-

답장을 보내고 또 곰곰이 회상에 젖었다. 그러다 문득 삐, 보일러 집 라디오의 시보소리가 들려 시계를 보니 벌써 저녁 일곱 시였다. 그 좋아하는 프로야구가 시작된 지 30분이나 지났다. 황급히 텔레비전을 켜니 다행히 롯데가 1회 말에 3점이나 뽑아 3:0 리드인데 잠시 후 이대호가 3점 홈런을 쳤다는 자막이 떴다. 오늘은 만사가 다 슬슬 풀리는구나 싶어 회심의 미소를 띠는데

- 모래 9월 4일 10시에 수자하고 같이 출발함. -

문자가 왔다. 그날은 흐뭇한 미소를 띠고 잠이 들었다.

이튿날은 하루 작품을 쉬고 일찌감치 밖으로 나와 보일러집 앞에서 부터 주욱 울타리를 따라 길게 자란 돼지 풀을 비롯한 잡초를 뽑고 양계장운반차에서 흘린 음식찌꺼기를 흙으로 덮고 대문에서 농막사이의 진입로를 깨끗이 풀을 베고 느슨하게 늘어진 그물도 팽팽하게 고정시켰다. 물탱크주위의 쓰레기를 주워 담아 소각을 하고 수돗가와 수채도 깨끗이 청소했다. 가끔 오는 영순씨가 올 때마다

“아이구, 할배냄새야! 그 문 좀 열어놓소.”

하던 말을 떠올려 종일 창문을 열어놓고 담요와 이불 베게까지 볕에 늘어 말렸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던 열찬씨가 창고를 정리하러 들어갔다. 바께스 위에 놓인 좌변기뚜껑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명색이 평생을 마음에 두고 사는 사람, 철없는 애인이나 불타는 연인은 아니지만 조용히 바라보는 정인(情人)이라며 안 그래도 물성(物性)을 배제하고 아련한 그림하나 그려가는 판에 그 원초적인 생리현상과 이 허술한 위생시설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안 그래도 후배 성수자시인이

“선배님은 오로지 순영이언니한테만 필이 꽂힌 외골수 같아요. 물론 언니가 예쁘고 단정하기는 하지만 선배님의 시를 잃다가 언니가 얼마 전에 뭘 잘못 먹고 설사병을 앓았거나 아랫배가 허해 산부인과에 갔던 생각을 하면서 나 혼자 실소를 금치 못했지요. 선녀도 화장실에 가고 천사도 부인병원에 간다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언니가 직장암수술을 하고 똥주머니 향낭을 차고 있을 때도 선배님의 시는 오로지 선녀고, 천사고, 황홀한 사랑이고 무지개고 환상이고...”

하며 웃었는데 당사자는 말은 않더라도 수자씨는 또 싱긋 웃으며 뭐라 할 것만 같았다.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