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모진 목숨 태어날 때2
에세이 제1190호(2020.12.20)
이득수
승인
2020.12.19 20:47 | 최종 수정 2020.12.19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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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일단 도망을 가야 매를 안 맞제. 나는 작년에 아부지 어데 갔는지 추달 받던 엄마가 온몸에 이열이 들어 꿍꿍 앓는 것을 보고 더쯩이 없더라. 아부지, 일단 도망갔다가 눈이 다 녹은 2월 영둥에 오면 안 되나?”
“나는 안 간다. 마땅히 갈 데도 없지만 가면 의심만 더 받고 또 집 나가면 춥고 배고프고 고생밖에 더 하겠나?”
“...”
입이 뾰르통해진 순찬이가 다섯 살 막내 덕찬이를 업고 와아, 여자들의 함성이 간간 터져 나오는 접동댁으로 건너갔다. 비록 달집은 못 태워도 명색 대보름이라고 처녀들의 널뛰기는 이미 시작된 모양이었다. 만사에 잘 끼어들고 당돌한 순찬이는 기출씨에게 입에 혀처럼 여러 가지로 편리하고 살가운 자식이면서 계집애가 저렇게 설치다가 무슨 일이 없을까 늘 걱정거리이기도 했다.
작년 여름 한창 빨치산들이 기세를 올려 밤마다 마을로 내려와 소와 곡식을 뺏어가고 사람을 헤치던 시절 세 살 많은 언니 갑찬이와 함께 얼굴에 숯 검댕을 칠하고 콩밭에 숨어 밤을 세고 들어오면 제 언니는 늘어져서 잠을 자지만 부지런한 순찬이는 온 마을로 돌아다니며 희한한 소식들을 물고 오고 중남지서의 순경이 시키는 대로 기출이가 서야하는 보초를 대신 서 주기도 했는데 네 아버지는 어디 갔느냐고 따지던 순경도 나중에는 참말로 당돌한 아이로다 하면서 껄껄 웃고 말기도 했다.
작년 가을 어느 날 갑자기 골목 가득히 다섯 명이나 되는 순경이 다 떨어진 옷에 시꺼멓게 멍든 얼굴의 축 늘어진 사내를 앞세우고 기출이네 집을 들이닥치던 순간을 순찬이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여기가 기출이, 이기출이 그 빨갱이부역자 집이란 말이지?”
사정없이 삽짝을 열고 들어와 온 집안을 뒤지기 시작하던 순경들이
“이기출이는 어데 갔소?”
갑자기 명촌댁의 머리채를 휘어잡더니
“이 빨갱이 반동 마누라, 남편 이기출이는 어데 갔소!”
버럭 고함을 지르며 명촌댁을 마당바닥에 무릎을 꿀리자 막내 덕찬이가 와아 울음을 터뜨리고 열한 살 일찬이와 일곱 살 금찬이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순간 순찬이는 슬그머니 덕찬이의 손을 놓고 뒤란을 돌아 대밭귀퉁이의 돌 복숭아나무를 타고 넘어 진장골짝 논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담을 넘으면서도 골수빨갱이 만택이의 유일한 친척인 외삼촌이 바로 아버지 기출이라면서 신불산에 입산해 방터와 들내와 논꼴에 수도 없이 많은 곡식과 소를 뺏어가고 동네머슴들을 데려가 산사람으로 입산시킨 그 악질 골수빨갱이가 외삼촌을 입당시키지 않고 가만 두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기출이가 빨갱이앞잡이가 되어 온 동네의 기밀을 다 외어 바치는 것이 틀림없다고 소리소리 아우성이었다.
영리한 순찬이는 달리면서 벌써 사건의 전말을 거의 꿰어 맞추고 있었다. 아마도 이미 걸레처럼 축 늘어진 그 다 죽어가는 사내가 순경에게 생포된 빨갱이로 만택이오빠의 수하이거나 이웃으로서 만택이의 소재를 추궁 당하자 외삼촌 되는 기출씨를 찍었다고, 아마도 그 사내가 보삼마을의 이웃집할머니의 아들일지도 모른다고.
쏜살같이 진장골짝논으로 달려간 순찬이가 혼자 철이 이른 천수답 논두렁공사를 하는 아버지를 부르고 속사포처럼 전후사정을 이야기하자 기출씨가 부들부들 떨면서 삽을 놓고 논두렁으로 나왔다. 마을을 내려다보니 동구 밖 앞새메에 순사들의 모습이 비쳤다. 곧 갈배기나 진장골짝이 아니면 진장밭이나 오룡골쪽으로 순경들이 기출씨를 잡으러 올 것이 분명했다. 순간 기출이는 순찬이의 손을 꼭 잡으면서
“니가 동생들이랑 식구들을 잘 챙겨라. 너거 엄마나 갑찬이는 나이만 묵었지 아무 것도 모린다. 니가 알아서 해라. 그저 모두 몸조심하고...”
말을 채 맺지도 않고 각골로 튀었다. 쌍수정을 지나 삼동방향으로 도망갈 모양이었다. 순찬이도 재빨리 순경들이 올라오는 밤살매방향을 피해 구시골 방향으로 뛰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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