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울아버지 명촌어른의 야맹증(夜盲症)3

에세이 제1186호(2020.12.16)

이득수 승인 2020.12.15 18:02 | 최종 수정 2020.12.15 18:14 의견 0

사실 요 며칠 전에도 마을 전체가 빨갱이들에게 쑥대밭이 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꾀보 기출씨(우리아버지)가 나서 급한 대로 불을 끈 적이 있기도 했다. 그날 밤 순찬이(제 대하소설의 이름, 실명은 이갑조)를 대동하고 보초를 서고 새벽녘에 들어와 곤히 잠든 기출씨를 누가 쿡쿡 찔러 눈을 뜨니 아뿔싸, 그게 바로 신불산 빨치산들의 따발총 총부리였던 것이다. 소나 쌀을 빼앗기는 것은 둘째 치고 옆방에 잠든 장성한 두 딸이 무슨 봉변을 당할지도 모르고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지도 모르는 판이었다. 두리번거리며 사태를 파악한 기출씨가
“아이구, 우리 집에 손님들이 오셨네. 내 안 그래도 근간 한 번 오실 줄 알았지요.”

주섬주섬 일어나 방과 마당에 대여섯이나 되는 밤손님 중  대장 같은 사내에게 절을 꾸뻑하고는 윗목의 장독 옆에 놓인 쌀통을 들고는 
“자, 쌀자루 주딩이 벌리소!”

기분 좋게 들이붓는데 겨우 보리쌀 서너 되밖에 되지 않자
“아차, 너무 작네. 가만 있어보소. 내 쌀 좀 더 드릴께.” 

하고는 부엌으로 들어가 쌓아놓은 땔나무를 뒤지더니 
“자, 이것도 가 가이소. 팔원 추석에 제사지낼 쌀 쪼깨 묻어 논 긴데 마 가가이소. 가정집 제사보다야 산에서 큰일 하는 사람들이 더 중하지요.”

하고 서너 되 되는 쌀을 붓고는 정말 무엇을 더 못 주어 안달이라도 난 사람처럼
“자, 기왕이면 달구새끼도 두어 마리 가져가소. 아무리 산중이지만 밥만 묵고 살 수 있나? 드문드문 괴기도 묵어야지.”

사진1 등억리 간월사지에서 본 간월재, 좌측이 신불산, 우측이 간월산, 잘록한 부분 너머 681고지가 지리산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 규모의 공비지휘소였다고 함.
등억리 간월사지에서 본 간월재. 좌측이 신불산, 우측이 간월산, 잘록한 부분 너머 681고지가 지리산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 규모의 공비지휘소였다고 함.

닭장의 닭도 두 마리나 날개를 꺾어 손에 쥐여 주자 진심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난데없는 호들갑스런 환대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사내가 마침내 진심으로 받아들였는지
“아니, 동무레 참으로 고맙고 친절하우다. 혹시 일가친척 중에 입산한 동지라도 있시유?”

반색을 하고 손을 내밀자
“아이 뭐, 높은 사람은 아니지만 신불산인지 지리산인지 어딘가에 들어갔다는 조카가 있심더.”

능청스럽게 받아넘기자
“아, 알겠수다. 이 쌀을 조금 덜어줄 테니 추석제사를 지내라우.”

하고는 
“자, 동무들, 이 마을에선 이만 하고 돌아갑시다!”

소리치자 골목을 서성대던 사람까지 따발총을 맨 아홉 명의 빨치산이 적기가를 부르면서 돌아갔답니다. 한참이나 지나 눈치가 늦은 명촌댁이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냉수를 떠와 기출씨에게 건네고 작은방의 갑찬이, 순찬이도 방물을 열고 나오자 어느새 앞집 접동댁과 옆집 상천댁, 언양댁, 하양댁, 택호가 없는 미짱네와 최선옥씨의 벙어리며느리까지 몰려오면서 허리가 완전히 굽은 접동댁이
“명촌이, 무슨 일은 안 당했나? 자네 집에 뺄갱이가 새카맣던데?”

묻자
“아임더. 그럭저럭 달래서 보냈심더. 아지매도 별일은 없지요?”

자랑스럽게 되묻자
“명촌이자네가 마실을 살맀네.”
“갑찬이아부지가 최고네. 우째 그리 눈치도 빠르고 말도 청산유순지 글 배운 장구장보다도 훨씬 낫네. 임 낫고말고.”

화산김손과 출강김손에 언양댁 끝갑씨까지 칭찬을 늘어놓는데 돌아앉은 외딴집에서 그 제서야 나타난 장구장은 자기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혀, 혀 형님이 욕봤심더. 형님이 최곤기라.”

덥석 기출씨의 손을 잡았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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