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울아버지 명촌어른의 야맹증(夜盲症)2

에세이 제1184호(2020.12.14)

이득수 승인 2020.12.12 21:17 | 최종 수정 2020.12.13 14:32 의견 0
 사진. 1978년 제 딸 슬비의 돌사진(왼쪽 아래서부터 네째누님딸 고미진, 장촌 넷째누님, 김해둘째누님 갑조(당시43세), 신평 큰누님, 아우 진수, 세째누님생질녀 박은주, 필자, 우리 엄마 명촌댁, 아내와 딸 슬비.)
1978년 제 딸 슬비의 돌사진(아래 왼쪽 끝에서 시계방향으로 네째누님딸 고미진, 장촌 넷째누님, 김해둘째누님 갑조(당시43세), 신평 큰누님, 아우 진수, 세째누님생질녀 박은주, 필자, 우리 엄마 명촌댁, 아내와 딸 슬비.)

그래서 버든마을에 생긴 묘한 속담이 <안 본 금시계>, <안 본 금송아지>와 <장 구장의 머릿속에 든 글>이었다. 말하자면 장구장의 속에 사서삼경이나 육법전서가 들었어도 조목조목 따져서 설명을 하거나 그 글로 밥벌이를 할 수가 없으니 그것은 마치 한 번도 보지 못한 누구네 아버지가 금시계를 찼다고 그 아들이 우기거나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누구네 집 안방에 금송아지가 있다고 떼쓰는 것처럼 장구장의 공부가 헛방이라는 것이었다. 배운 장구장의 언변이 서당이나 영명학교의 문턱에도 안 가본 기출씨의 온갖 타령이나 이야기, 농악상쇠나 선소리꾼의 그 질펀하고 유장하며 눈물 돋게 하는 사설보다 못 하다는 말도 나왔다.

그렇지만 말을 더듬어 표현은 못 할망정 장 구장은 또 필체가 좋아 커다란 체격, 잘 생긴 얼굴과도 어울린다고 버든마을의 선비이자 대학자인 석암선생이 감탄하기도 했다. 그 뿐 아니라 하루는 우연히 만난 기출씨에게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 버든마을의 지신(地神)이 두 인물, 두 천재를 내었는데 불행히도 마을자체가 산의 정기를 받지 못하는 천변(川邊)에 자리 잡아 깊은 뿌리와 높은 가지를 가진 거목이 되지 못 하고 말았는데 그 두 사람이 너무 가난해 글을 배우지 못 한 자네(우리 아버님)와 글을 배웠어도 말을 못하는 장구장이라고 하면서 한참이나 혀를 끌끌 찬 일도 있었다고 한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용의주도한 조두천씨가 장구장을 후임으로 점찍은 것이었다. 시화연풍의 좋은 시절이 아닌 말 한 마디에 생목숨이 좌우되는 이 살벌한 전쟁 통에 마을의 구장이란 아무리 눈치가 빠르고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도 어쩌다 실수라도 하게 되면 자신과 마을사람모두가 큰 화를 당하기가 십상인데 비해 글을 배워 세상살이와 남의 말의 의미를 알고 주어진 상황에 대하여 나름대로 바르게 판단을 하며 남의 질문이나 채근에도 마치 벙어리마누라가 행실을 의심하는 서방에게 변명하는 “그, 그, 그, 거,”서툰 몇 마디로 대충 얼버무리는 장구장식의 말투가 비록 빛나지는 못 할망정 특별한 사단을 불러오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 조두천씨의 배려대로 장구장의 어눌함을 가장 먼저 제대로 덕본 사람이 바로 우리 아버님 기출씨었다.

 사진2.작천정입구엣 찍은 사진, 멀리 신불산과 간월산이 보이는데 야간에 주요 공비출몰로임
 작천정 입구서 찍은 사진. 멀리 신불산과 간월산이 보이는데 야간에 주요 공비출몰로임.

바야흐로 석남재, 운문재 너머로 또 경주에서 인보, 구량, 반곡을 거쳐 직동고개에 하얗게 피난꾼들이 몰려오던 단기 4283년도, 그러니까 민족상잔의 6.25가 발발한 한여름이었다. 제법 어깨가 벌어진 17, 8에서 서른 전후의 젊은이들이 죄다 병정으로 불려가고 마을에 남은 쉰다섯까지의 장정들이 낮에는 군용트럭과 탱크가 지나갈 국도를 보수하고 군수물자를 저 나르는 부역(負役)을 하고 밤에는 마을마다 빨갱이가 내려옴직한 산 구비나 길목에 보초를 서던 시절이었다. 

이미 마흔아홉의 꽉 찬 나이에 벌써 허리가 굽고 머리가 희끗희끗한 기출씨가 초저녁에 보초를 서러 봉당골로 나가면서 열다섯이 된 둘째딸 순찬이를 데리고 나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보초를 서는 아버지 옆에서 왔다갔다 잔심부름이나 하며 부녀간에 무어라고 밤새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고 마을사람들은 어려서부터 객지살이와 눈치 밥 먹기를 오래해 꾀가 많은 기출씨가 무언가 또 재미있는 사단을 꾸밀 것이라며 은근히 기대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는 열흘에 두세 번은 마을에 신불산의 산손님(스스로는 빨치산이라 불렀지만)이 내려와 소나 쌀을 뺏어가기도 하고 말을 안 듣는 노인네들의 아랫배를 따발총으로 쿡쿡 찔러대던 때라 어스름이 지고 달이 뜨거나 깜깜 어두워지면 집집마다 과년한 딸들을 솥 밑(사람들은 솥 밑구녕이라 불렀다.)에서 긁어낸 검댕으로 얼굴을 새까맣게 칠하고 깜깜한 콩밭이나 고구마 밭에 숨게 하고 아무 생각 없이 살던 우리 큰누님 갑찬이조차 해만 지면 뒤란의 대밭이나 작은 방의 장롱에 들어가기가 바쁜 판에 이미 열일곱이나 되는 딸을 밤길에 데리고 다닌 다는 것이 아무래도 수상쩍은 일이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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