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시인 이득수의 「70년간의 고독」 - 울아버지 명촌어른의 야맹증(夜盲症)1

에세이 제1183호(2020.12.13)

이득수 승인 2020.12.12 15:22 | 최종 수정 2020.12.12 15:37 의견 0

벌써 한해의 마지막 달 12월, 그 12월도 상순을 지나 이제 올해는 딱 20일 정도가 되었습니다.

매년 해가 바뀌어 새 달력을 달 때 저는 떨어진 달력의 마지막 12월이 마치 미련 많은 노인네의 뒤통수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평생을 살아온 자기의 생가마을이 댐건설이나 도시계획으로 뜯겨 뒤돌아보고 또 뒤돌아보는 노파처럼 말입니다.

60대 후반에 암에 걸려 70대 초반이 되도록 5년간을 버티며 저는 12월만 되면 묘한 징크스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 둘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포토에세이의 송년사를 한해를 살아온 애환가 내년을 기대하는 희망찬 내용으로 써보려고 해도 벌써 3년째 김소월의 시 <가는 길>을 반복해서 올릴 수밖에 없다는 점, 그만큼 소월의 시가 애절하고 울림이 좋기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보다 좋은 송년사가 생각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마 올해의 마지막 날도 그러할 것 같습니다.

또 한 가지 연말만 되면 유독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이 간절합니다. 한 평생 가난한 농부였지만 선소리 잘 하고 막걸리 잘 마시던 우리 평리부락의 마지막 상쇠, 말년에 천식에 걸려 기동이 힘든 5년 이상을 제가 간병한 육친이면서 제게 그리움과 서러움, 그리고 어떤 환경에도 살아남은 생존력을 물려주신 스승이자, 감성의 원천(源泉)으로 한창 마음여린 열일곱의 겨울에 떠나가신 아버님에 대한 애련한 정은 제가 아버님이 돌아가신 나이보다 5년 이상을 더 산 70대에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작년에 이어 올해도 저의 육친이자 그리움의 원천인 우리 아버님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올리기도 하겠습니다.

사진1. 신화리에서 본 신불산일대(좌에서 부터 영축산, 취서산 신불산. 이제 인구와 산업시설이 늘어 덩그런 신불산을 찍기가 힘듬.)
신화리에서 본 신불산 일대. 좌에서 부터 영축산, 취서산 신불산. (인구와 산업시설이 늘어 덩그런 신불산을 찍기가 힘듦.)

울아버지 명촌어른의 야맹증(夜盲症)1

이 이야기는 작년 여름 코로나가 한참 기승을 부릴 때 김해의 요양원에서 피부암으로 돌아가신 우리 둘째누님 갑조(제 소설 신불산에서는 순찬씨)로 부터 들은 6.25 전쟁 통의 신불산 아래 우리 버든 마을에서 일어나 에피소드(아직 저는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지만)입니다.
 
당시 밤만 되면 신불산 너머 빨치산들이 봉화를 올려 면사무산 아래 가천리는 물론 면사무소가 있는 작하마을까지 불빛과 함성이 어른거릴 때였습니다. 삼남면 지서에서 쉰이 다 된 우리 아버님에게 보초근무를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고생한 아버님이 꾀 많은 둘째 누님과 짜고 밤눈이 어두운 행세를 해서 아버지는 보초를 면하고 대신 그런 사람을 보초를 서게 하고 대신 우리 마을의 장구장만 엄청 혼이 난 이야기지만 그 끝은 매우 훈훈한 실화입니다. 

이미 돌아가셨지만 이 세상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두 육친(肉親), 돌아가신 아버님과 누님을 추억하며 찬찬히 써나가기로 하겠습니다. 

평리마을 전임구장 조두천씨(진장에서 복숭아과수원을 경영했음.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목사의 생부)는 일찍 도시물을 먹어 부산에서 선박업을 경영하며 해방전후 평리부락의 이장을 지내자 6.25 직전  마을에서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의 명단을 불태워 버려 이미 전국 골짝골짝의 농사꾼이나 머슴살이하는 사람들이 나중에 공짜로 논밭을 나눠준다는 말에 솔깃해서 도장을 찍어주고 떼거리로 잡혀가서 몰살당한다는 소식을 듣고 평리주민이 연명으로 손도장을 찍은 문서를 찾아 불태워버리고 마을사람들에게 우리는 그런 일로 도장을 찍거나 보도연맹소리를 들은 일이 절대로 없다고 교육할 정도의 담대하고 슬기로운 사람이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더 이상 구장자리에 머물러있으면 혹시 무슨 의심이라도 받을까 싶어 복숭아를 따다가 일부러 낮은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면서 몇 바퀴나 뒹군 후에 얼굴의 찰과상에 아까징끼라고 부르는 붉은 약을 가득히 바르고 근 보름이나 자리보전을 하며 심장이 안 좋다고, 조금만 무리하면 즉사할 수 있다고 구장 직을 사표 낸 것이었다.

그렇게 사표를 낸 조두천씨가 후임으로 추천한 사람이 바로 말을 더듬는 장구장이었다. 장구장은 구시골에서 살림살이나 전답이 으뜸을 서로 다투는 황씨, 최씨, 장씨의 새 집중의 장씨댁의 차남이었고 어릴 적에 기골이 장대하여 키가 훌쩍 크고 코가 뭉툭하고 길쭉한 장군의 상에 글귀에도 밝아 구시골에서 큰 인물이 나왔다고 자라면 뭔가 한 자리를 할 것이라고 소문이 난 인물이었다. 

 사진2. 60세 전후의 우리 아버지 명촌어른(1903-67). 삼동면 작동리에 사촌형님 결혼상각으로 갔을 때 찍은 사진을 잘라 영정으로 쓰던 사진임.
 60세 전후의 우리 아버지 명촌어른(1903-67). 삼동면 작동리에 사촌형님 결혼상각으로 갔을 때 찍은 사진을 잘라 영정으로 쓰던 사진임.

그래서 아버지가 농사꾼으로서는 참으로 큰마음을 먹고 언양공립보통학교인 영명학교를 졸업시키고 시오리나 되는 들내마을의 서당에도 3년이나 공부시켜 매우 공을 들였다. 이제 고등문관이나 순사부장이 되어 울산군수 한 자리쯤은 충분히 할 것으로 마을사람들은 엄청난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릴 적부터 조금씩 더듬던 말투가 나이가 찰수록 심해지며 사춘기를 맞아 변성기가 되면서 걷잡을 수 없을 지경이 되어버렸다. 아마도 세상살이와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말더듬이에 대한 자의식이 더욱 심해져 점점 더 상태가 악화된 모양이었다. 입신출세하여 바깥세상에 나가지 못 하니 자연 좁은 구시골에서 빈둥거릴 뿐이었다. 

차마 농사일을 시키기도 아까웠지만 할 줄도 몰랐다. 그래서 버든바닥에서는 그 어려운 공부를 하고도 무슨 벼슬은커녕 취직이나 돈벌이도 못 하는 것은 두고라도 그 태산 같은 기골로 쟁기질도 땔나무도 못 하는 그를 보고 마을사람들은 <족찌비를 잡았다.>고 빈정거렸다. 

농촌의 담벼락을 넘나들며 주로 담구멍에 숨어사는 쥐나 뱀을 잡아먹고 간혹 병아리를 채가기도 하는 그 족제비가 막상 잡아서 가죽을 벗기면 담 구멍을 드나든다고 가늘고 길쭉한 몸뚱이가 도무지 먹을 것이 없는 데 빗대어 감히 영명학교나 서당에 다닐 엄두는커녕 하루하루 먹고살기도 바쁘고 제 이름 자도 못 쓰는 것은 물론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자신들의 처지를 자위하는 것이었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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