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열한 살이 차이나기도 했지만 장남으로 집안의 모든 사랑과 촉망을 한 몸에 받은 형님과 달리 나는 처음부터 아버지를 이어 농사를 지을 아들로 지목받아 제때 입학을 안 시킬 정도로 괄시를 받았지만 그 당시 시골에는 그렇게 장차남 간에 차별이 심했다. 거기에 한 술 더 뜨는 것은 형님은 성격이 몹시 내성적이고 이웃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세가 있어 늘 움츠리고 살았다. 임종 직전 아우와 제가 영주의 병원으로 문병을 가서 형님을 양 어깨로 끼고 가 소변을 보고 왔는데 바지에 오줌방울이 튄 걸 괜히
“이기 다 득수 절마 때문에 그렇다.”
몸이 그 지경이 된 임종직전에 어째 그런 생각이 떠올랐는지 나에게 전적으로 화를 풀었는데 그건 평생 뭔가 잘 안 풀리면 괜히 가장 만만한 상대인 내게 화를 푸는 습관에 기인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나는 같이 문학을 하는 선배로서 또 독서를 좋아 하는 인문학도로서 형님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어 평생 형님을 존경하고 지금도 그 마음이 변함이 없다.
형님은 성격이 느긋하지 못해 그런지 나처럼 내용이 길고 지루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 톨스토이의 <부활>.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이나> 또 미국의 나다니엘 소호이 쓴 <주홍글씨>(낙인이란 뜻으로 특히 도입부가 너무 길고 지루해 이 도입부를 끝가지 읽은 사람이 지구에 몇 없을 거란 소문이 있다)와 프랑스의 에밀졸라가 쓴 일련의 연작 <종매배트>나 <나나>의 내용을 이야기해주면 너무나 좋아하며 그 줄거리와 주인공을 차곡차곡 외웠다.
문학을 좋아해 백일장만 하면 상을 타지만 너무 공부에 지쳐 형님은 긴 글보다는 수상집, 역사서, 사회심리학의 단행본을 읽고 나와 밤새 교대로 독후감을 이야기하는데 그렇게 한번 토론이 시작되면 새벽에 제사를 지낼 시간이 되도록 끝이 나지 않았고 형님이 애연가라 밤새 담배 한 갑을 다 피우기로 했다. 독서와 문학에 관한한 너무나 다정한 형제였다.
또 형님은 평생 일기를 빠트리는 법이 없었고 자기가 읽은 책에 대해서 빠짐없이 독후감을 썼는데 내가 읽어본 독후감은 그 줄거리와 주제가 잘 파악되고 요약되어 어디 흠잡을 수 없는 수작, 독후감자체가 어떤 수필이나 짧은 소설보다 훌륭하다는 생각이 다 들었다.
마흔다섯 살의 내가 첫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를 내자 쭈욱 읽어보고 너무 어린 나이에 벌써 책을 내었다고 혀를 끌끌 찼는데, 내가 행정사무관이 되어 동장이 되어 제사를 모시러가자 옛날부터 소년등과(少年登科), 일찍 출세하면 뒤끝이 좋지 못하다는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하며 결코 축하의 말을 하지 않았다. 소년 적부터 집안의 모든 총애를 차지한 자신이 새까만 동생에게 칭찬을 하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일부러 자신의 가난한 가거와 조현병을 앓은 괴로운 기억이 깃든 고향 언양을 버리고(교직발령을 회피하고) 일부러 기차로 네 시간이 더 걸리는 영주로 떠난 형님은 학생들에겐 인기가 좋은 국어교사지만 회식만 하면 교장, 교감 선생님과 싸워 나중엔 쉬는 날에 거의 낚시로 세월을 보냈는데 엎드려 책을 읽기 좋아하는데다 매일 분필가루를 만지고 낚시를 하느라 줄담배를 피워 쉰여섯에 그만 폐암이 오고 말았다.
그 때부터 나를 만나면 재주는 부족(자기보다)하지만 늘 최선을 다해 공무원으로 사무관이 되고 시집을 네 번이나 낸 나를 참 대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내가 낸 네 권의 시집을 일일이 다 읽어 보니 그래도 처녀시집의 등단작이 제일 순수할 뿐 아니라 시골사람의 우수가 잘 나타나 있다고 처음으로 나를 칭찬했다.
그래서 형님이 쓴 시와 일기와 독후감을 추려 책을 내면 금방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라고 책을 내어보자고 하니 자신의 사후에 동생이 해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용기가 없다고 했다.
가난과 외로움과 질병은 물론 대가족의 장남이라는 부담감에 평생을 억눌려 맨 정신으로는 큰소리 한 번 못치고 마침내 조현병까지 앓은 언양 천재 우리형님은 발병한지 3년이 되어 유명을 달리했다. 영주에서 화장을 해 언양으로 운송, 자신의 통학로인 태화강 다리 밑에 뿌려주고 식사를 한 뒤 나는 직장일이 바빠 바로 부산으로 귀가했다.
그리고 1주일쯤 지나 형님의 서가에 있는 인문학서적을 일부수습하고 평생 쓴 일기와 독후감(업무수첩으로 한 서른 권이 넘었으니 아마 원고지 몇 만매는 되었으리라.)을 수습하여 책을 내려 헐레벌떡 영주로 올라가는데 왠지 불안한 생각이 들더니 형님의 서재 문을 여는 순간
“...!”
그 많은 책과 책장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었다.
“형수, 여기 책은요?”
“초상 친 바로 이튿날 고물장사 불러 처분했지.”
“저런? 그 귀한 책을?”
“귀하기는 평생 내 원수였다. 우리가 결혼해서 32년을 살았는데 신혼시절을 뺀 30년 정도 대름형님은 그노무 책하고 살아 나는 평생 독수공방이라 그 책장만 보면 이가 갈렸다.”
국민학교를 나온 형수, 농협에 다니는 사람에게 시집가면 평생 손에 흙을 묻히지 않을 거라며 자원해서 시집을 온 너무 활달하여 경박한 형수는 시동생들이 달라할까 겁이나 3,000평의 논밭과 우리 생가를 불과 3년 만에 다 팔아가고 작은 아들도 아들이라고 방학만 되면 두 아이와 어머니를 우리 집에 보내고 군에서 제대한 동생의 취직이나 결혼에 전혀 신경을 안 써 작은 형도 형인 내가 결혼을 주선한 예식장에서 부조 통을 챙겨 영주로 도망간 도무지 상식이 안 통할 만큼 물성(物性)이 강한 사람이었지만 세상에나 남편의 평생성과를 단 사흘을 못 넘겨 폐기해버리고 그 자리에 커다란 침대를 넣고 레이스가 화려한 커튼을 치다니...
결국 언양 천재 우리형님은 평생을 제 마음속 검은 그림자를 지우지 못해 너무나 괴롭고 외로운 일생을 살았는데 그 많은 명저와 칼로 새긴 전각 같은 시와 일기를 단 한편 발표하지도 못 하고 이제 영영 잊어진 사람이 되었다. 거기다 아이들과 손자들의 형편, 남은 형수의 살림살이도 갈수록 피폐해지고, 한 천재가 앓은 불치의 외로움은 너무나 많은 부작용을 남기고 결코 해피엔딩이 되지 못했다. 평생 형님을 두렵고 거북하게 생각하던 나도 병이 들고 칠십이 넘자 비로소 미운 생각보다는 불운한 형제에 대한 슬픔이 우러나기 시작했다.
형님, 부디 모든 걸 잊고 그윽이 계시소서. 다시 저와 만나면 이제 비로소 마음을 열고 새로운 형제의 정을 펼칠 것 같습니다. 헝님, 안녕히...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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